살아 숨 쉬는 고대 - 황하문명 현대까지 이어지는 유일한 고대 문명 다양한 부족과 민족이 이룩한 아시아 문명의 상징  

황하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문명, 인더스문명과 더불어 고대 4대문명이라 일컬어지지만, 타 문명에 비해 천 년 이상 늦는데다가 피라미드 같은 거대한 상징물을 남긴 것도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낮게 보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영향 아래 발생한 후발 문명으로 간주하는 서구 학자도 있다. 반면 중국학자들은 최근 고고학적 성과를 근거로 하여, 황하문명은 자생적인 것이고, 그 발생시기도 훨씬 이르다고 주장한다. 아예 4대문명의 배열 순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열을 올리기도 한다. 이 같은 극단적인 시각의 편차 저변에는 모종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전자에 유럽을 세계문명의 중심으로 규정하는 우월감이 깔려 있다면, 후자에는 21세기 들어 용트림하는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가 꿈틀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것인들 달가울 게 못되지만, 후자의 경우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와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에 더욱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때문에 우리의 시각으로 황하문명을 되짚어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한반도에는 봄철이면 어김없이 불청객 황사가 찾아온다. 그 주요 발생지가 황하 유역의 황토 고원과 평원이다. 강수량이 적어 누런 먼지가 빈발하는 이 지역은 현재 가장 빈곤한 곳에 속한다. 황하는 이곳을 흐르기에 늘 누런 흙탕물이다.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황하문명이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탄생하였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도전’과 ‘응전’의 원리로 설명하는 토인비(Toynbee)를 떠올리게 된다. 즉, 살인적인 더위와 추위, 그리고 홍수 등으로 살기 힘든 환경의 도전에 맞서 싸우면서 황하문명이 나왔다는 설명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대 문명이 움트던 시절의 황하 유역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자 ‘爲’는 이에 관한 흥미로운 정보를 간직하고 있다. 영어의 ‘do’ 정도에 해당하는 이 글자를 은(殷)의 갑골문(甲骨文)은 ‘손’과 ‘코끼리’의 합성자로 쓰고 있다. 즉, 손으로 코끼리를 잡고서 일을 시킨다는 뜻이니, 당시 코끼리가 일상생활에 널리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지역에서는 수많은 코끼리 화석과 상아가 출토된 바 있는데, 이 코끼리는 지금 동남아에 서식하고 있는 것과 동일종이다. 그렇다. 황하문명이 태동하던 시절, 그 일대는 기후가 따뜻하고 숲이 우거져 코끼리 같은 야생동물이 뛰놀던 곳이었다. 게다가 고운 입자로 이루어진 황토는 부석부석하여 쉽게 밭갈이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황하보다 길고 수량도 풍부하며 더 비옥한 양자강 유역에서 먼저 “문명”이 형성되지 않았던 것일까? 물론 이 지역에서도 많은 신석기문화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벼농사가 발달하였던 하모도(河姆渡)문화, 아름다운 옥기(玉器)로 유명한 양저(良渚)문화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은 지금보다 기온이 훨씬 높고 대부분이 늪과 소택지로 뒤덮여 있어, 문명 형성에 불리한 환경이었다. 사실 선사시대 유적은 중국 대륙 도처에 널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하 유역이 유독 ‘문명’의 단계에 진입한 이유는 향후 풀어야할 과제이다. 필자는 이 지역이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여러 부족과 민족의 각축장이었기에, 정치적 ․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국가 조직이 일찍 싹텄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아무튼 당시 황하유역의 자연 조건이 어느 지역에 뒤지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황하문명은 곧 황토문명이다. 왜냐하면, 황토는 단순한 농경지에 그치지 않고, 건축 자재로, 토기(土器)의 재료로, 청동기를 주조하는 거푸집으로 쓰일 뿐만 아니라, 조금만 파고들어 가면 그 자체로 요동(窯洞)이라는 토굴집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인은 자신들마저 황토의 소산이라 믿었다. 여신 여왜(女媧) 시절, 하늘과 땅은 막 개벽되었고 세상에는 아직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왜는 홀로 황토 대지 위에 쪼그려 앉아 황토를 반죽하여 자신의 형상대로 진흙 인간을 하나하나 빚어냈다. 그녀는 쉬지 않고 진흙 인간을 만들어냈다. 오랜 노동으로 인해 그녀는 탈진할 지경이면서도 쉬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을 빚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다. 굵고 긴 새끼줄 하나를 찾아내어 잘 개어놓은 황토 진흙탕에 집어넣은 다음, 새끼줄을 휘둘러서 흙덩어리를 땅 위에 뿌려 사람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여왜가 속도를 높이자, 대지 위에는 금방 사람의 자취가 그득하게 되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이들이 바로 자신들의 조상이며, 또 황토가 노란색 피부를 결정하였다고 믿었다. 비록 손으로 정성껏 빚어 귀인(貴人)을 만들고 새끼줄로 대량 생산하여 천인(賤人)을 만들었기에 세상에 귀천이 있게 됨은 불만이지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중국의 역사는 오제(五帝)에서 시작하여 삼대(三代), 즉 하(夏), 은(殷), 주(周)를 거쳐 진(秦)과 한(漢)으로 이어진다. 오제는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제요(帝堯), 제순(帝舜)이다. 이 가운데 황제는 문명을 창시한 시조로서, 우리의 단군에 해당하는데, 그의 이름에 황토의 빛깔이 스며들어 있다. 제요(요임금)와 제순(순임금)은, ‘요순시대’가 바로 ‘태평성대’와 동의어로 쓰이듯이, 동양적 유토피아를 구현한 성왕(聖王)으로 꼽힌다.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무렵, 황하가 범람하여 홍수가 천하를 휩쓸었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우(禹)이다. 그는 장장 9년에 걸친 사투 끝에 사나운 물길을 잡는 데 성공하여, 그 공으로 순의 뒤를 이어 천자에 오른다. 요에서 순으로, 다시 우로 이어지는 통치권의 계승을 ‘선양(禪讓)’이라 하는데, 이는 이 시기가 부족 연맹 단계이었음을 시사한다. 우의 제위가 아들 계(啓)에 상속되면서 선양의 전통은 사라지고 마침내 왕조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왕조가 바로 하이고, 대략 기원전 21세기에서 기원전 16세기까지 지속한 것으로 중국의 사학계는 인정한다. 뿐만 아니라 그간 발굴된 신석기문화를 오제와 꿰맞추려고 하고 있다. 말할 것 없이 중국문명을 세계 최고(最古)로 격상시키려는 의도이다. 그러나 오제는 고사하고 하 왕조마저 그 실재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 따라서 현 단계로서는 황하문명은 은에서 탐색해보는 것이 온당하다.

은(기원전 약 16C - 기원전 약 11C)은 탕(湯)이 하의 폭군 걸(桀)을 타도하고 세운 왕조로, 원래의 국호는 상(商)이었다. 은은 후기 도성을 딴 이름이다. 역대 사서의 확고한 기록과 달리, 그 실재가 입증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1899년 하남성 안양현(安陽縣) 부근 소둔(小屯)이라는 마을 옆을 흐르는 원하(洹河)가 범람해서 제방이 무너지자, 그 곳에서 해묵은 거북 껍데기(龜甲)와 짐승 뼈(獸骨)가 발견되었다. 처음 이것들은 ‘용골(龍骨)’이라 하여 한약재로 유통되었다고 한다. 우연히 한 학자가 여기에 문자가 새겨져 있음을 발견하고 은의 기록임을 알아냈다. 그 뒤 수년(1928-1937년)에 걸쳐 조직적인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대량의 갑골과 함께 거대한 왕릉과 궁궐터 그리고 수많은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었다. 연구 결과 이 곳이 ≪사기≫에서 말하는 ‘은허(殷墟)’로서, 반경(盤庚)에서 마지막 왕 주(紂)까지의 도읍임이 밝혀졌다. 20세기 중국 고대문명연구의 최대 발견으로 일컬어지는 이 쾌거로 황하문명은 그 신비스런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적으로 ‘문명’이란 씨족사회나 부족연맹을 넘어 국가 조직을 형성한 단계를 지칭한다. 보통 여기에는 정치(궁궐과 관공서), 경제(수공업과 상업), 문화(종교 포함)의 중심이 되는 도시가 있게 마련이고, 또 문자 기록과 야금술 등이 포함된다. 은허는 이들 요건을 다 갖추고 있다. 궁궐터를 비롯한 많은 주거지, 기물을 제조하던 공방(工房), 수레와 화폐 등의 발견은 은허가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음을 입증해준다. 또 거대한 왕릉에서 수백 명의 순장인(殉葬人)과 많은 부장품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는 은 왕실의 강력한 권력을 웅변한다. 다양한 청동기는 은 문화를 대표한다. 황토 거푸집으로 주조한 청동기는 당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여주고, 그것의 정제된 외형과 정교한 문양은 높은 예술 수준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은의 문자는 거북 껍데기(甲)나 짐승 뼈(骨)에 새긴 갑골문이다. 은 왕실은 제사, 농사, 기후, 전쟁, 사냥 등 거의 모든 일을 천제(天帝)에게 물었다. 즉, 갑골을 불로 지지거나 태워 생기는 균열을 보고 천제의 뜻을 점쳤던 것인데, 그 결과를 새겨놓은 것이 갑골문이다. 특히 제사에 관한 점이 많고, 그 대상은 주로 조상신과 자연신이었다. 점과 제사로써 정치 질서를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제정(祭政) 일치의 문명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청동기나 순장도 신을 섬기는 수단이므로, 신비한 종교적 분위기가 만연하였을 것이다. 은의 왕은 정치적으로는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인 동시에 종교적으로는 귀신과 인간을 소통시켜 주는 최고의 ‘무당’이었던 것이다.

은나라 사람은 원래 산동 반도 인접의 황하 하류에 살면서, 흰색을 숭상하고, 새를 숭배하던 동이(東夷)이었다. 이 점에서 보자면, 동이족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전혀 근거 없는 허튼 소리가 아닌 듯 하다. 은의 마지막 왕 주(紂)가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이루게 하여 그 안에서 남녀가 벌거숭이가 되어 긴 밤을 향락(酒池肉林)으로 보내고 있을 무렵, 은 왕조의 서쪽 변두리에 위치한 화하(華夏) 집단 주(周)는 국력을 비축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문왕(文王)에 이르러 강태공(姜太公)의 보좌에 힘입어 서백(西伯), 즉 서방의 우두머리가 되더니, 아들 무왕(武王)은 마침내 은의 대군을 목야(牧野)에서 무찌르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이렇게 은은 멸망하고 동이족은 중원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무왕은 은을 칠 때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내걸었다. 덕을 잃어 하늘로부터 버림받은 전(前) 왕조를 다른 성씨의 소유자가 천명(天命)을 따라 갈아치운다는 뜻이다. 따라서 주는 은과 차별화를 시도하게 되는데, 공자(孔子)의 다음 말은 양자의 차이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은나라 사람은 신을 떠받들었기에 백성을 이끌고 신을 섬기며, 귀신을 앞세우고 예를 뒤로 하였다. … 주나라 사람은 예를 떠받들고 베풂을 숭상하였기에, 귀신을 섬기고 공경하지만 멀리하였다.(≪예기 표기≫)” 즉, 은 왕조의 무술문화(巫術文化)가 주 왕조의 인문문화(人文文化)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예(禮)를 숭상하는 주의 문화정신은 유교로 계승되고, 한(漢)나라 때 국교로 채택된 이래 역대 왕조들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정착한다. 그러나 은의 문화가 소멸된 것은 결코 아니다. 천지신명을 숭상하던 은의 정신은 21세기 북경에 건재하고 있는 천단(天壇)과 지단(地壇)이 상징하듯이 중국인의 심성이 되어 살아있거니와, 갑골문의 한자는 방대한 국토와 유구한 시간 속의 중국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거의 유일한 구심점으로 기능하여 오고 있다. 요컨대 은과 주 왕조가 이룩한 황하문명은 중국을 지탱하는 두 축이 되었다.

대장정 끝에 중국 공산당은 황토고원 연안(延安)에 근거지를 마련함으로써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에 성공한다. 황하문명을 잉태하였던 황토고원이 다시 신중국을 탄생시킨 셈이다. 이는 황하문명이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황하문명은 현대까지 이어지는 유일한 고대문명이자, 아시아문명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이족을 포함하는 다양한 부족과 민족이 이룩한 공동 자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동양에서 건너간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이 없었다면 서구의 근대화가 불가능하였다는 사실을 유럽중심주의자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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