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명의 기원, 그리스 문명 신화의 미토스, 열정적 파토스, 이성적 로고스 조화 특징 로마에 수용, 크리스트교와 서양 문명 토대  

  서구 문명의 기원이 그리스 로마 문명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늘날 영어 단어의 70%정도가 그리스어 및 라틴어에서 나왔으며, 철학, 건축술, 정치체제, 문학, 법률 등도 대개  그리스로마 문화 특히 그리스 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19세기의 영국 시인 셀리는 ‘우리 모두는 아직도 그리스 시민’이라 하였다. 인터넷과 가상 세계의 발달로 동서양의 구별이나 고대와 현대의 구별이 모호해진 오늘날 그리스문화는 오히려 더욱 우리 곁에 자리 잡고 있는 듯 하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르면 왕따 당한다고 한다. 이에 관한 책이나 만화 판매량은 엄청나다. 나이키 신발을 신고, 헤라 화장품을 바르며 비너스 속옷을 입고 박카스를 마시고 디오스 냉장고를 사고,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베스트셀러를 읽는 우리는 크고 작은 그리스 신들의 브랜드 틈바구니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최첨단 미우주항공국 NASA에서 우주선 이름을 아폴론으로 정한 것도 재미있지만, 맥킨토시 애플 컴퓨터의 상징인 ‘사과’도 창업주 스티븐 잡스가 『일리아스』의 파리스의 사과에서 따온 것이다. 잡스는 자신의 영감의 원천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라고 하였는데, 최첨단 기술에 능한 창업자가 그리스 고전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푸코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합리성, 효율성, 기술성 등으로 특징짓고, 이의 대안으로 고대 그리스 사회로 되돌아갈 것을 제시한다. 실제와 환상, 역사와 신화, 자연과 인간, 로고스와 미토스가 의좋게 짝지었던 시대로의 복귀를 주장한 것이다.

  얼마 전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얻으면서 서방뿐만 아니라 터키에서도 소아시아 트로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트로이의 역사가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그 바탕이다. 『일리아스』는 성서와 함께 서양인들에게 가장 널리 읽히던 책이었다. 여기에 묘사된 트로이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고 고고학 발굴을 시작하였던 이가 19세기 독일의 H. 슐리이만이다. 그는 일리아스의 서술을 바탕으로 1871년 터키의 히사를리크 언덕 유적 발굴에 성공함으로써 트로이 전쟁에 대한 역사적 실제성에 대한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히사를리크 언덕은 헬레스폰토스, 즉 다다넬스 해협의 입구에 있는 요지이다. 슐리이만 이후에도 이 발굴은 계속되었다. 되르펠트(W. Dörfeld)는 트로이 유적지를 선사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 9개의 도시 층으로 구분하였다. 슐리이만은 불탄 흔적이 있는 이층을 트로이의 유적층이라고 믿었지만, 현재는 육층 (혹은 칠층)을 트로이로 보고 있다. 이 층의 흔적이 트로이 전쟁의 전설과 연대가 부합하는데다가, 성벽 바로 안쪽에 도시 주변을 에두르는 넓은 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트로이에 관한 호메로스의 변함없는 수식구인 “넓은 길을 가진 트로이”의 모습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트로이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호메로스는 트로이의 미남 왕자 파리스가 그리스 최고의 미녀 헬레네를 유혹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헤로도토스도 아시아와 유럽의 분쟁이 시작되게 된 것은 이오나 에우로페, 헬레네 등 서로간의 여성 납치 사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현대의 버이유도 해상 활동의 일환으로 파리스가 헬레네와 재물을 약탈하여 싸움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그 외 여자의 납치는 구실이고, 실제로는 경제적 패권 다툼으로 흑해 해상권을 둘러싸고 싸웠다는 무역 전쟁설, 해적 전쟁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핀리는 미케네는 침략한 일이 없으나 후일 와전되었다고 본다. 반면 와트킨스는 최근 히타이트 문자를 조사하여 언어학적인 증거로 미루어보아 실제로 미케네인이 싸우러 왔을 것이라 믿었다.

  슐리이만은 소아시아 히사를리크 언덕의 트로이에 이어, 아가멤논의 왕국 미케네, 티린스 등 그리스 유적지를 발굴하는데도 성공하였다. 호메로스가 “금이 풍부한 미케네”라고 표현하였듯이, 미케네에서는 황금가면을 비롯하여 호화로운 귀금속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들보다 먼저 꽃을 피운 지중해 문명이 있었다. 이는 에게 해를 배경으로 한 크레타 문명이며, 영국의 에반즈에 의해 1900년 발굴되었다.

  그리스 문명의 모태가 되는 에게해 문명의 본산지인 크레타 섬은 미노스왕의 통치기에 그 근방의 모든 지역을 복속시키며 거대한 ‘바다 왕국’을 이루었다고 한다. 라비린토스라는 미궁에서 미노타우로스라는 무시무시한 소인간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하는 데 비해서, 크레타 섬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들은 모두 평화롭고 경쾌하다. 부드럽게 컬을 낸 머리칼과, 볼연지와 입술, 날씬한 허리, 젖꼭지가 그대로 비치는 예쁜 옷을 입은 여인들이나 문어, 돌고래, 온갖 종류의 화초, 특히 백합을 든 왕자 등 크레타 섬의 프레스코 벽화들은 아름답고 우아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들에게 고대 최고의 회화민족이라는 별명도 부쳤다.

  신화에 의하면 미노스를 낳은 이는 에우로페라는 페니키아(현재 레바논 근처)의 공주였다. 에우로페의 미모에 반한 제우스가 하얀 소로 변해 그녀에 접근하여 납치에 성공한 뒤 데리고 온 곳이 크레타섬이며, 여기서 미노스를 비롯한 아이들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의 오라버니 카드모스는 그리스 본토 테바이에 정착하여 그리스인들에게 페니키아 문자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크레타 섬에서는 에우로페와 소가 그려져 있는 화폐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공주의 이름에서 ‘유럽’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보는 점이다. 또 이는 아랍이라는 말의 어원과도 같다고 하니 오늘날 문명 충돌을 빗고 있는 유럽 문명과 아랍 문명은 같은 뿌리에서 나타난 것인지 모른다. 크노소스, 코린토스 등 그리스어의 어미에 나오는 essos 나 assos 등의 단어들은 그리스에서 기원한 단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바다를 뜻하는 그리스어인 ‘thalassa’도 외래어이며, 바다의 신 포세이돈도 그리스 바깥에서 들어온 신이라고 본다. 또 크레타섬의 프레스코 벽화에 그려진 사람들은 오늘날 유럽인도 아시아인도 아닌 모습이다. 이러한 점들은 그리스 문명 자체가 오리엔트를 기반으로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달한 복합 문명임을 알게 해 준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독창적인 문화를 발달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스인들과 그들의 어머니 문명인 오리엔트 문명과 구별지어주는 정신은 아마도 미와 자유를 향한 열정인 파토스와 이성적 학문 정신인 로고스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에는 어떤 종류의 사랑도 포괄적으로 인정되었고, 사회 법률적 제재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쾌락주의, 양성섹스, 최음제, 색정광, 수간 등 그리스어에는 성에 관한 용어들이 매우 발달하여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인들의 성에 대한 개방적인 사고와 관행을 드러내주는 듯 하다. 그리스 항아리나 접시 등의 도자기에서는 온갖 자세로 성적 관계를 맺는 그림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신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신들이 바로 그런 자유를 즐기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파토스를 절제하여 이성적 로고스와 조화시켜나갔다. 그리하여 니이체는 디오니소스적 열정적 문화와 아폴론적 이성적 문화가 잘 조화된 그리스 비극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으며, 빙켈만은 그리스 예술의 특징을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으로 정의하였다. 러셀은 인류의 정신사에 끼친 유럽의 공헌에 대해서 ‘종교나 예술은 세계 어디에도 있는데, 유럽이 세계에 내놓은 것은 학문의 이념’이라고 지적하였다. 오늘날 대학 교육의 기본적 방법과 태도인 ‘Socratic method’가 이와 관련된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뚜렷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다만 그는 진리란 무엇이며, 선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검토해나가는 태도와 방법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리스인들의 절제된 로고스는 민주주의의 싹을 트게 하였다. 브린톤은 ‘유럽은 알파벳에서 집고양이에 이르기까지 수천가지의 유산을 오리엔트로부터 상속받았지만, 단 한 가지 민주주의만은 유럽의 발명품’이라고 말하였다. 『거울에 비친 유럽』을 쓴 폰타나는 이에 대해 ‘그리스는 자유롭고 아시아는 전제적이었다는 생각, 통치에 집단적으로 참여한 자유시민이 거주하는 폴리스의 이미지는 하나의 환상’이라고 말하면서, 아테네 민주주의는 전혀 평등하지 않았으며, 노예, 농민의 소외, 여성의 예속, 빈부차이를 은폐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아테네 민주정의 고대적인 한계점을 잘 지적하고 있으면서도, 균형감각을 상실한 말이다. 민주열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져온, 그래서 많이 좋아졌다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만 하더라도 아직도 얼마나 허점이 많으며, 기득권층에 의해서 교묘히 조종당할 여지가 많은가 말이다. 또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 특히 불법 체류자들의 곤고한 처지는 마치 현대판 노예 같다. 아마 인간 본성이 존재하는 한 그런 문제들은 계속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아테네 민주주의는 많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도 배심원으로 뽑힐 수도 있고, 의회나 민회의 의장이 될 수 있었던, 즉 시민들이 모두 함께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는 체제를 지금부터 무려 이천 오백년 전에 실험하였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의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 정신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과 더불어 헬레니즘 문화로 전파되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점은 알렉산드로스의 바람과는 달리 오리엔트 쪽 보다는 서쪽에서 나타난 로마가 그리스 문화의 진정한 양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세계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에 수용된 그리스 사상은 뒤이어 들어온 크리스트교와 함께 결국 서양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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