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서 유일한 인문사회과학 서점인 ‘문화공동체 청년글방’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될 위기에 처했다. 80년대만 해도 광주에 6~7개의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국에서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대학 앞에 위치한 청글의 역사와 현재 문을 닫게 된 원인, 청글 살리기 운동 등에 대해 알아보자.

전국에서 유일한 인문사회과학 서점인 ‘문화공동체 청년글방’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될 위기에 처했다. 80년대만 해도 광주에 6~7개의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국에서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대학 앞에 위치한 청글의 역사와 현재 문을 닫게 된 원인, 청글 살리기 운동 등에 대해 알아보자.

/엮은이


# 청년글방의 역사와 역할

우리 대학 정문에서 왼편으로 조그만 골목에 위치한 ‘청년글방(이하 청글)’은 베트스셀러와 대학교재를 취급하지 않고 오직 인문사회과학 서적만을 주 메뉴로 내놓는 서점이다.

청글은 지난 1988년에 생겨나 13년째 운영되고 있다. 지금부터 20여 년 전인 88년에 현 청글 주인 김형중 씨(국문과 강사 문학평론가)의 고등학교 선배인 문충선 씨가 우리 대학 정문 모아타운 사거리 장터국밥 자리에 ‘청년글방’을 열었다. 당시 청글은 7평 정도의 조그만 공간이었는데, 이 공간이 너무 좁아 98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25평 남짓한 지금의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청글이 자리를 옮긴 다음해부터는 문 씨의 바통을 넘겨받아 김형중 씨가 청글을 운영하게 됐다.

청글은 단순히 책을 팔고 이윤을 내는 서점이 아니라, 대학가에서 문화운동을 하는 ‘문화공동체’의 역할을 하려 노력해왔다. 이 까닭에 청글의 이름도 ‘문화공동체 청년글방’이 됐다.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문화운동을 하려고 노력한 청글이 그동안 해온 일들은 각양각색이다.

청글 안쪽에 상당히 많은 비디오테이프들이 꽂혀 있는데 이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밤샘 주제별 영화제 등을 개최해 영화를 상영하며 시네마테크운동을 했던 흔적이다. 지금은 이러한 운동은 사라지고 테이프만 회원들에게 빌려주고 있다.

또한 ‘저자 초청 강연회’나 ‘생태 강좌’를 진행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웰빙이 유행하기 전에 청글에서 열린 생태 강좌는 1주일에 1번꼴로 진행됐고, 대안학교를 찾는 등 생태캠프를 4년 동안 하기도 했다. 

이후 청글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우선 청글이 살아남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세미나 위주로 행사가 바뀌게 됐다. 청글의 세 평짜리 세미나실에서는 영화, 물리 세미나 등이 매일 저녁 돌아가면서 열리며 교수 대학원생 문화운동가 대학생 등이 참여한다. 이곳은 또한 ‘아마존의 눈물’(커피)과 ‘고원의 푸른이슬’(녹차) 등을 마시며 책을 읽는 ‘북카페’이기도 하다.

# 청년글방 재정난과 원인

청글이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을 때는 단 한번도 없었다. 특히 90년대 초중반부터 항상 재정적 위기였다. 김형중 씨가 지금의 청글을 인수할 1999년 초. 그는 우리 대학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준비하던 가운데 사회과학 전문서점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또한 누군가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원 조교 수당으로 모은 1천여만 원으로 청글을 인수하게 됐다.

이후 지난 2001년에는 다시 한번 경영난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외상대금을 입금하지 못해 서울 도매상의 책 공급이 끊기기도 했다. 흔히 단골로 유지가 된다고 하나 청글은 계속 적자를 냈고 현재 우리 대학 대학원생, 인문대 철학과, 국문과, 사회대 학생들 가운데 극소수가 청글을 찾고 있다. 청글 출신으로 현재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이 책을 사기도 하고, 청글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가하는 이들이 교재로 책을 사기도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청글을 운영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청글을 유지하는 데는 하루에 20권 정도의 책을 팔면 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책이 거의 팔리지 않아 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올해 4월부터는 그나마 청글을 찾던 학생들의 발길을 더욱 찾아보기 힘들어졌다고.

청글 재정난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가 대중문화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80년대 책을 보는 문화에서 이제는 영화와 인터넷 등을 보는 문화로 바뀌었다. 다음은 출판문화의 변화인데 이는 사람들이 책을 인터넷 서점에서 사게 됐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의 관심사가 변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 등에 대한 고민이 적고 책을 읽지 않는 문화가 팽배하다는 것. 결국 서점 하나가 이러한 대세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 현재 청글의 재정난을 불러일으켰다.


# 청년글방 살리기 운동

그동안 여러 차례 ‘청글 살리기 운동’이 진행돼 왔다. 90년대 초중반 더욱 어려워진 청글을 살리기 위해 95~96년에는 청글 살리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있었다. 2백여 명의 단골들이 모여 5천원, 1만원씩 모아 빚의 일부를 갚고 문 닫을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이때 청글을 법인화하기 위해 조합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절차가 까다로워 포기했다. 2001년에는 ‘청글 후원의 밤’이 열렸으며, 이 외에도 작게는 캠페인운동 등이 진행되기도 했다.


# 청글 주인 김형중 씨 인터뷰

“우리 대학 학생들 2만 명 가운데 하루에 10명만 청글에서 책을 사도 이처럼 청글이 문을 닫는 일은 없다”

김형중 씨는 “청글에서 책을 보고 사람을 만날 수 있어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됐지만, 지금은 재정적자로 청글을 유지하기 매우 어렵다”고 전했다.

“한번도 청글을 나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는 김 씨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맘대로 문을 닫을 수 없다”며 “우선 후원회원들과 시민단체에 이를 알리고 여러 가지 다른 대안들을 최대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문을 닫는 것은 비단 광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광주를 문화중심도시라고 하면서도 큰 돈이 들지 않는 인문사회과학 서점 하나 살리지 못하는 것이 매우 아쉽다”고 밝혔다.

 

 

 

청년글방 사람들

 

행복했던 추억들 정다운 이들


첫 문장, 첫 문장, 첫 문장. 그곳에서, 그날들을, 그 사람들을 묘사하는 글의 첫 문장은 영원한, 절대적인 문장이었으면 했다. 그곳에서의, 그날들의 감정을 모두 묘사해 낼 수 있는, 그 사람들의 때로 고르고 때로 거친 냄새들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그 첫 문장. 그러나 글이 시작해버린 아직까지도 나는 그 첫 문장을 찾지 못했다. 지금 나는 노트북에 손을 올린 채로 그곳 앞을 지나간다. 상상을 한다. 하얀색 내 자전거를 타고 그곳을 지나간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채, 누군가 있는지 살피면서,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지나쳐 가야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아,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사실 나는 아무도 없을 것을 짐작하며 그곳 앞을 지나간 것이다. 지금 시간은 새벽 2시. 오후 10시가 문 닫는 시간이니, 그곳의 철문은 이미 닫혀진지 오래다. 그것을 알면서 나는 그곳을 지나가는 상상을 했다. 아니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몇 번씩 반복된 기억이다. 조금 전의 새벽 1시, 집으로 오는 길에도 나는 그곳 앞을 지나쳐 왔다. 그 시간이 언제이든, 정문 근처를 가게 되면 그곳 앞을 지나쳐 가게 된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여전히, 상상을 통해서도 첫 문장은 찾지 못했다. 내가 그곳을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게 되었을 뿐이다. 왜? 그곳을 왜 그렇게 찾고 있지? 답은 아직 찾지 못한 첫 문장 속에 들어 있을 것이다.

‘청글에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 문장은 모든 갈급(渴急)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 문장은 글의 제목이기 때문이다. 제목은 그곳의 의미를 찾으며 쓴 것이 아니라, 그것은 미리 정해져 있던 문장이었다. 그렇기에 그곳을, 그날들을, 그 사람들을 묘사하는 글의 절대적인 영원한 문장이 될 수는 없다.

‘청글에는 정확하지 않은 이름들이 있다’ 형중이 형(언제나 형이라 부르고 싶었음에도 선생님으로 부르고 있는), 호범이 형, 시욱이 형, 효영이 누나, 성호 형, 무영이, 지애, 유미, 윤희, 가영이, 설희, 순미 선생님, 유홍주 선생님, 조대영 선생님, 영삼이 형, 현갑이 형, 현룡이 형, 홍민이 형, 그리고 불리지 못한 또 다른 이름들까지. 위 이름들은 순서가 바뀌어도 아무 관계가 없다. 지금 나는 그들의 이름을 꾹꾹 눌러 쓰는 손가락의 촉감을 빌어 한명씩 호명하고 있다. 그들의 이름. 늘 정확하지 않고 어설프게 불리웠던 그 이름들. 윗니와 아랫니로 당근을 베어 물듯 호명한 이름들, 무수한 그 의미들.

내가 그들을 만난 것을, 그들 속에 내가 있었던 것을 나는 자랑하겠지만 구체적으로 자랑하지는 않겠다. 그들의 느낌을, 순전히 공기 중에 떠도는 느낌으로 존재하는 영원한 그들의 의미를, 한 순간의 설명으로 지워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불편하겠지만, 별 수 없다. 나는 그들의 느낌을,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럼으로써 그날들을, 그곳에서의 그 사람들을, 내 속에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들이 준 것은 쓸 데 없는 설명의 단어가 아니라 오직 한 단어,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찾았다! 그 첫 문장.

‘청글에서 나는 사람들과 행복했다’가 그것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모든 설명을 대신해 주는 문장이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은 문장이다. 이제로부터 영원히, 무수한 문장들이 나에게서 태어날 것임을 믿는다. 그 문장들은 글자의 형태가 아니어도 관계없을 것이다.


 / 윤용석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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