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면 현란하다. 세계화로 인해 우리의 삶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세계와 연결되었고 인터넷은 우리의 생산 방법과 삶의 방법을 끊임없이 바꾸어 나가고 있다. 옛날처럼 수대에 걸쳐 같은 식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지금은 한 사람의 지도자나 한 가지 산업이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정보와 기술과 생각, 그리고 판단들이 얽혀져 거대한 홍수가 되어 어디론가 우리를 끌고 가고 있다.  요즘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면 현란하다. 세계화로 인해 우리의 삶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세계와 연결되었고 인터넷은 우리의 생산 방법과 삶의 방법을 끊임없이 바꾸어 나가고 있다. 옛날처럼 수대에 걸쳐 같은 식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지금은 한 사람의 지도자나 한 가지 산업이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정보와 기술과 생각, 그리고 판단들이 얽혀져 거대한 홍수가 되어 어디론가 우리를 끌고 가고 있다.

우리가 가는 이 시대, 이 문명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백년이 지나 우리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21세기는 인류 역사에 빛나는 한 세기였을까 아니면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 올라간 메뚜기처럼 괜히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그런 시간들이었을까?

또 어떤 사람이 있어 백 년 전의 눈으로 지금을 본다면 우리는 얼마나 달라져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로 간 것일까? 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보는 것은 내가 어디로 가는가를 알기 위해서이고 눈을 들어 멀리를 내다보는 것은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알기 위한 것이다.

바쁜 일상에 파묻혀 정신없이 살다가 언뜻 귓가를 스쳐가는 솔바람에 번쩍 정신이 들어 자신을 돌아보고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헤아려보는 것은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산마루에 올라 내가 사는 집과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도 좋은 일이리라.

오래된 샘물이 있어 언제부턴가 흘러나와 지금도 우리를 적셔주고 있으니 탁한 홍수 말고 그 샘에 다가가 우리를 비추어보면 어떨까? 그 샘이 비록 작고 짜잔하고 옹색하더라도 그 물로 우리 조상들이 목을 축이고 삶을 의지하고 우리를 길러내었다면 한번쯤 시간을 내어 다가가 비추어볼 필요는 있으리라.


오래 된 동양의 눈으로 보자면 현대 사회는 여러 가지가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호연지기라고 해서 온 천지를 내 가슴에 품고 내 삶의 외연을 사회와 천지로 넓히려고 노력하였었다. 천지만물의 영역을 공(公)이라 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천지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도(道)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나’는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물리적 ‘나’일뿐이다. 예전에는 사회와 천하를 위하여 내 몸을 썼지만 지금은 나를 위해 사회와 천하를 활용한다.

인간의 수명은 백년이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시간은 사람마다 그리고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르다. 백년을 앞뒤로 내다보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오늘, 당장, 지금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동양에서 제사를 지냈던 것은 먼 과거의 시간과 나를 하나로 생각했기 때문이고 죽을 때 후손들을 위해 좋은 명당을 찾아 몸을 뉘였던 것도 죽은 다음의 시간까지도 나의 시간의 연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아도 가고 있는 시간을 “빨리 빨리, 더 빨리-” 재촉하여 정말 더 빠르게 가게 하더니 아는 시간도 ‘지금’뿐이다. 나의 시간은 하루만을 걱정하며 사는 하루살이의 시간인가 한 철을 사는 나비의 시간인가 십년을 사는 참새의 시간인가 백년을 사는 사람의 시간인가, 아니면 삼천년을 산다고 하는 붕새의 시간인가?



현대 사회를 살다보면 자주 듣게 되는 말이 ‘권리’다. 노동자의 권리, 노숙자의 권리, 장애인의 권리, 납세자의 권리, 여성의 권리, 남성의 권리, 학생의 권리, 학교의 권리, 아이의 권리, 노인의 권리... 그런데 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항상 투쟁적이고 사나운 모습일까? 그것은 권리란 것이 대부분 서로 상충되기 때문이며 한 사람의 권리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억누르고야 달성되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권리는 사용자의 권리와 상충되고 남편의 권리는 아내의 권리와 상충되며 아이의 권리는 어른의 권리와 상충된다. 서로 자기의 권리를 들고 남의 권리와 충돌하면서 사는 것이 현대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권리 주장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남의 권리를 반대로 존중해준다면 어떨까? 그런 것도 가능할까? 그런 것을 이름 하여 옛날에 ‘도리’라고 하였다. 도리를 지키는 사람은 자기보다 먼저 남을 생각하며 가족을 생각하며 국가와 사회를 생각한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스스로 사회적 의무를 다한다. 사람마다 도리를 지키면 다툴 일도 없고 소송을 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권리에 대한 주장이 많아지는 만큼 법도 많아지고 있다. 당사자간에 조정이 안 되니 재판을 하게 되고 분쟁의 종류에 따라 해결하는 일반적 룰을 정하니 그것이 곧 법이며 이를 담당할 법관과 변호사 또한 많이 필요하게 된다. 동양 사회가 도덕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해왔다면 현대사회는 법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도덕으로 맡긴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는 데 이것을 성선설이라고 한다.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로 태어났고 악이란 일시적인 착오로 생겨난 것이므로 선한 본성을 깨우치는 교육을 하는 것으로 사회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대 사회는 이 점에서도 확연히 다르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오히려 이것을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우리는 듣는다. 나아가 동물적 본능이야말로 인간의 순수한 모습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사람이 동물과 어떻게 다른가를 배웠다면 지금은 사람이 동물과 어떻게 같은가를 배우고 있다. 이 점에서 현대는 기나긴 인간의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가족과 사회와 같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인간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공동생활에 필요한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사랑, 인내, 어질음, 자비와 같은 것들임을 깨우쳤다. 이것이 세계의 종교들의 주요 주제가 되었으며 하나같이 자기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현대 이전 수천 년 동안 인류에게 있어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은 바로 남을 사랑하는가 동물적 본능대로 사는가였다. 현대 사회에서처럼 인간의 이기심이 그대로 여과 없이 표출되고 ‘존중되는’ 시대는 없었다.



현대 사회는 인간들에게 “깨어라”, “도전하라”고 외친다. 보다 더,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쉬지 말고 나아가라고 한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넘치는 것은 의욕이고 부족한 것은 잠, 밤, 자기반성이다. 인간 능력의 무한함을 믿는 것은 현대에 특유한 믿음이자 미신이다. 반대로 동양은 “쉬어라”, “그쳐라”, 인간 능력의 유한함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인간 능력이 정말 무한한 것인지 유한한 것인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문제지만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활동하는 시간이 있으면 멈추고 되돌아보는 시간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만약 사람마다 자기의 무한한 능력으로 끝없이 세상을 마음대로 바꾸려고 한다면 어떤 세상이 될까? 세상을 의욕적으로 고치려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이 혼란스러워진다고 말하면 지나친 말일까? 나의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의욕은 다른 사람의 능력과 의욕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의욕과 이념도 그 근원은 사람의 욕구다. 나의 욕구와 의지대로 세상을 고치려고 덤비는 것은 마치 개구리가 자기를 위해 온 세상을 우물로 만들려고 덤비는 것과 같다. 온 세상이 우물 천지라면 개구리는 살기 좋겠지만 메뚜기나 참새는 어떻게 산단 말인가?

현대를 풍미하는 이념들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에서 진보란 대체로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고 보수란 대체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에 필요한 것은 이중의 하나가 아니다. 다른 건 없고 평등하기만 한 사회, 이런 사회는 우물 천지와 다르지 않다. 반대로 자유 천지는 풀밭만 있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 사람의 삶에 필요한 것은 이중의 하나도 아니고 두 가지 다도 아니다. 평등과 자유와 풍요와 평화와 가정의 행복과 신체의 안전과 복지와 서로간의 믿음과 사랑, 미래에 대한 희망 등이 모두 필요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구태여 평등과 자유로만 나누는 것은 우리 사회가 거기에 특히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런 뜻에서 자유와 평등 또한 현대 사회 특유의 미신이다.



어쨌건 사람이 의욕을 갖고 세상을 고치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자기의 목표를 백 퍼센트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은 자칫 다른 사람의 의욕을 꺾고 우물 천지, 풀밭 천지처럼 단조롭고 삭막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남의 의욕, 나와 다른 이념에도 길을 내어주는 여유를 가질 수는 없을까? 그러자면 나의 유한함을 인정하는 동양적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바쁘게 사는 사람일수록 되돌아보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바쁘게 달려가다 보면 길을 잃을 수 있지만 쉬엄쉬엄 가면 길을 잃지 않는다. 되돌아보고 주위를 살필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모두 물질적 풍요, 자기만족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혹시 그것이 신기루는 아닐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다른 데 있다고 백년 후에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런 것을 피하고 싶다면 사람들이 빠름의 장점을 이야기할 때 느림의 미학을 천천히 음미하는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최석만(사회학과 교수)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모두 물질적 풍요, 자기만족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혹시 그것이 신기루는 아닐까? 빠름의 장점을 이야기할 때 느림의 미학을 천천히 음미하는 용기가 있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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