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는 한낱 4B 연필로 스케치한 그림이 되었으며 자신의 몸을 먹어치운 입으로 존재했다. 그저 입으로만 남은 그를 두고 “그의 입”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함을 잘 알고 있으나, 어쨌거나 그의 입에서, 아니 입인 그에게서 “말”들이 기어 나왔다. 그 말들은 두루마리 화장지의 끝을 잡고 천천히 풀어내는 모양으로 가냘프게, 그러나 쉼 없이 기어 나왔다. 사람들은 그 말을 소설이라 불렀다. 혹은 그 말들 스스로가 소설이 되었다. 그것들에는 곧 「생명연습」,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등의 이름이 붙었다. 18년 동안 그의 입에서 두리번거리며 소설들이 기어 나왔고, 19년째에 그의 입에서는 신의 별칭인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온 최후의 단어였으며 당연히 그의 입은, 아니 입은 그는 그림자에게 -즉 단지, 어둠에게- 잡아 먹혔다.
스무 살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부질없는 이상주의자들을 할퀴고 싶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그러니까 내가 TV 만화영화의 내용을 이해하게 된 이후로, 나는 늘 악당들이 불쌍했다. 그들은 어차피 싸움에 지거나, 추방당하거나, 죽거나, 결국엔 벌을 받았다. 처음엔 그들이 간혹 우위를 점할 때도 있으나 그건 나중 벌을 위한 초석에 불과했다. 승리자는 늘 주인공이었고, 어떤 정의였으며 보나마나 뻔한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어린 내가 그 만화영화들을 끝까지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실로 악당들이 불쌍해서였다. 단 한번이라도 그 악당들이 결말에 가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어차피 지고 말 그들이 그들의 운명을 거스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주인공이 아니었던 그들은 끝까지 주인공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꿈과 희망을 준다는 이야기들을 믿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때 나는 확인되지 않은 미래를 더 나은 미래라고 믿는 이상주의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많은 곳에서 많은 노래를 불렀으며 꿈과 정의, 희망을 품는 자들이었고 주인공이었다. 물론 그들은 승리자가 되거나 되어야하며 그리하여 보다 몇 배의 “악당”들을 처벌할 것이었다. 모든 이들이 미래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나는 ‘더 이상 미래를 꿈꾸지 않는 자’이고 싶었다. “네 삶의 주인공은 바로 너”라고 호령하는 선배들에게 나는 “아니요, 전 철저하게 소외된 인간이고 싶어요”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그들을 윽박지르고 힐난하며 얼굴과 가슴을 빈번하게 할퀴는 것이었다. 어쩌면 단 한마디 -집어치우라고!- 였을 수도 있다.
찾을 수 없거나 찾지 말아야 할 답을 찾으려 헤맬 때, 길을 안내해 주었던 이는 오래전 단지, 어둠 속의 입이었던 자였다. 그는 김승옥이라 했다. 그의 기록을 펴자 동시에 어둠 속의 입이 벌어졌고 그 입은 「무진기행」을 읽어주었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악당이었던 자가 더 완전한 악당이 되는 과정이 나와 있었다. 차례로 과장된 슬픔을 연출하고 거짓된 울음을 짓는 법을 「생명연습」과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가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서울 1964년 겨울」은 어느 때 억지로 웃어야 하는지도 알려주었다. 나는 그것들을 소설이라 부르기로 결심했다. 그때 나는 벌써 스무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