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날 대학은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대학도 산업이라는 주장마저 제기되고 있다. 5년마다 개최되는 세계철학대회(World Congress of Philosophy)는 20차 대회를 1998년 미국 보스톤에서 가졌는데, 20세기 마지막 대회로서 주목받은 이 대회의 전체 주제는 파이데이아(paideia)였다. 희랍어 파이데이아는 인간이 겪는 일체의 형성을 가리킨다. 세계철학대회가 하필 파이데이아를 주제로 삼은 것은 현대사회가 인간의 위기, 교육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대학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날 대학은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대학도 산업이라는 주장마저 제기되고 있다. 5년마다 개최되는 세계철학대회(World Congress of Philosophy)는 20차 대회를 1998년 미국 보스톤에서 가졌는데, 20세기 마지막 대회로서 주목받은 이 대회의 전체 주제는 파이데이아(paideia)였다. 희랍어 파이데이아는 인간이 겪는 일체의 형성을 가리킨다. 세계철학대회가 하필 파이데이아를 주제로 삼은 것은 현대사회가 인간의 위기, 교육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수의 문명비평가들이 우리의 시대를 문명사적 대전환기로 규정한다. 그런가 하면 학문의 분과화 및 전문화로 인해 어떤 개별 연구자도 학문 전체, 대학 전체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정황에서 과거 대학이 떠맡았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음미하는 것은 대학의 진로와 정체성을 모색하는 데에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유럽을 이끈 대학제도       

  독일 대학의 강의 시간표에는 ‘10 s.t.’니 ‘10 c.t.’와 같이 표기되는 경우가 있다. 입학할 때 numerus clausus가 적용되는 학과인지를 살펴야 하고, 박사학위를 얻으려면 rigorosum을 치러야 한다. 이 표현들은 모두 라틴어이다. s.t.는 sine temporare의 약자로 10 s.t.는 정각 10시에 강의가 시작됨을 뜻하고, c.t.는 cum temporare에서 온 것으로 10 c.t.는 15분의 여유를 두어서 10시 15분에 강의가 시작됨을 뜻한다. numerus clausus는 ‘제한된 수’란 뜻으로 numerus clausus가 적용되는 학과에서는 대학 입학 허가가 제한된다. rigorosum은 원래 ‘엄격한 (시험)’이라는 뜻인데 오늘날에는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구술 시험을 말한다. 오래된 대학 건물에 라틴어 경구나 라틴 숫자로 된 건립 연도가 새겨져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으며, 학위 수여와 같은 공식 행사에서도 라틴어를 자주 듣게 된다. 이런 것들은 유럽의 대학 제도가 중세의 산물이요 여전히 중세 이래의 전통을 잇고 있음을 말해준다. 유럽 중세 사회에 확립된 세 가지 제도로 신성 로마 제국, 로마 교회 그리고 대학을 들 수 있다. 이 세 가지 제도에 대응되는 세 힘 - 왕권, 교권 그리고 대학이 유럽의 중세를 이끌었다. 대학은 제국과 교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중세에 확립되었던 학위 제도, 분야별 교과목, 교수의 전문성, 수학 기간 등이 현대의 대학들에서도 상당 부분 통용되고 있다.


우니베르시타스와 스투디움 게네랄레

  대학을 지칭하는 말로는 두 가지가 있다. 오늘날 대학을 가리키는 university란 말은 라틴어 universitas에서 왔다. 우니베르시타스는 본래 대학에만 국한되어 사용된 말이 아니라 목수 조합, 상인 조합 등과 같이 공동 이익을 위해 구성된 조직에 두루 쓰인 말이었다. 따라서 우니베르시타스는 사람으로 구성된 집단을 말하는 것이지 어떤 집단의 위치나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중세의 대학은 목적을 같이 하는 사람들로 시작되었지 도서관이나 실험실 혹은 강의실 등의 시설이나 건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해 시설이나 장소라는 뜻에서의 대학을 가리킬 때에는 스투디움 게네랄레(studium generale) 혹은 줄여서 스투디움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스투디움 게네랄레는 특정한 나라나 지역이 아닌 모든 지역의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곳을 의미하였다. 오늘날에도 유럽 대학에서는 스투디움 게네랄레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 의미는 바뀌어서 모든 학과의 학생들에게 개방된 과목을 뜻한다. 대학을 가리키는 두 용어 가운데 우니베르시타스가 근대 이래 단일한 명칭으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대학과 길드적 전통

  초기 대학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길드(guild)와 깊은 관계를 갖는다. 교수와 학생들이 스스로 이룩한 자치적 조합으로서의 대학은 길드의 전통과 성격을 이어받아 자신들이 규율을 만들고, 스스로 구성원을 선출하고 선발했으며, 배우고자 하는 자들은 국적, 사회적 지위나 계층에 상관없이 받아들이는 개방성을 견지했다. 입학, 수업, 학생이나 선생들 간의 등급, 위계질서, 후견인의 개별 지도(tutorial system) 등이 모두 길드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세 길드의 장인이나 대학의 교수는 공히 마스터로 불리웠다. 입학 절차도 길드에의 입단 절차와 비슷하며, 시험을 치르고 가르친 것을 실습해보게 하고 일정한 연한과 절차를 마치면 학위 수여식을 거행하는 것도 유사하다. 학장(rector)이란 명칭도 길드에서 왔다. 

최초의 대학들에서는 무엇을 가르치고 배웠나

  중세 대학의 주요 전공 분야는 신학, 법학, 의학이었고, 이들 학문들을 공부하기 위한 예비 학문으로서 7 자유학과(artes liberales)가 있었다. 7 자유학과는 다시 3학과(trivium)와 4학과(quadrivium)로 나뉘는데, 3학과에는 문법, 수사학, 논리학이 속하고, 4학과에는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이 속한다. 오늘날 인문대학을 영어로 표기할 때 ‘college of humanities’라고 하거나  ‘college of liberal arts’라고 한다. 이때의 liberal arts는 라틴어 표현 artes liberales의 영어 번역이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얻는 학사 학위를 bachelor of arts, 석사 학위를 master of arts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중세 이래의 artes liberales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대학이 출현한 초기부터 각 대학이 특정한 학문 영역에 연구를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컨대 파리대학은 신학과 철학, 특히 논리학의 아성이었고, 볼로냐 대학은 법학의 중심지였다. 점차 학문의 분화 현상이 일어나고, 이 분화는 대학의 조직을 변화시켰다. 기초 학부는 인문학부(facultas artium, faculty of Arts)로서 대략 1250년 이후에는 7 자유학과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전반에 대한 연구를 포괄했다. 

                 

학생 운동

  유럽에서의 학생 운동은 근대 민족국가의 수립에 있어서 앞서 있었던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중앙 집권적 통일 국가의 실현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과 문화에서도 뒤처져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독일의 학생 결사(Burschenschaft) 운동이나 이탈리아의 ‘청년 이탈리아’ 운동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잉태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1813년에 이르러 독일 대학생들은 나폴레옹의 전제적 지배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책 대신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아갔다. 해방 전쟁에서 귀환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 결사가 조직되기 시작하여 1815년 예나대학에 처음으로 부르셴샤프트가 결성되고 ‘명예, 자유, 조국’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렇게 해서 독일 대학은 1815년에서 1848년 사이의 시기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의 진앙지가 되었다. 학생 결사의 단기인 흑, 적, 황색의 삼색기는 독일 통일의 상징이 되었고 오늘날 독일 국기로 정착되었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

  유럽 대학에서의 학문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오랜 세월에 걸친 투쟁에 의해 쟁취된 것이다. 대학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위협하는 각종 시련을 견뎌야 했다. 예컨대 17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거액의 연금을 주겠다고 회유한 유태 교회를 끝내 거부하여 파문당했다. 그는 렌즈를 가는 일로 생계를 이어 가면서도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그의 학식을 인정하여 교수로 초빙했으나 스피노자는 대학에 몸담기 위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버릴 수 없다며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 당시에는 대학도 신교와 구교를 둘러싸고 다른 편에 편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유태교로부터도 기독교로부터도 파문당한 스피노자는 종교적 발언을 삼간다는 단 하나의 조건만 채워주면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유럽의 대학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교수, 학생 그리고 스피노자와 같은 대학 밖의 지식인들에 의해 그 본래적인 기능을 발휘해 왔다고 하겠다.


대학의 사회적 책임과 저항 정신

  예전의 탄광에서는 막장 작업 현장에 새 몇 마리를 넣은 새장을 두었다고 한다. 새장의 새가 힘을 잃고 비틀거리면 갱에 유독 가스가 찼다는 신호가 되어 광부들이 피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은 한 사회의 정신적 공기 청정도를 나타내는 바로미터이다. 가장 먼저 부패한 공기를 감지하고 이를 세상에 알린다. 더 나아가서 대학은 그 부패한 공기에 대한 저항의 몸짓을 보여 왔다. 나치 치하에서 목숨을 던져 부패한 정신에 항거한 뮌헨대학교 학생들은 그 한 사례이다.

  서슬이 퍼런 나치의 폭압이 그 도를 더해가던 1941년, 뮌헨대학교 철학과 학생이던 한스 숄과 소피 숄 남매는 동료 학생들과 함께 ‘백장미’라는 이름의 비밀 조직을 결성했는데 이 때 철학 교수인 후버가 이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양심의 회복과 국가에 의해서 저질러진 폭력과 학살의 종식을 주장하는 지하 운동을 펼친다. 급기야 1943년 2월 18일 나치 타도를 촉구하는 삐라를 대학 본관에 뿌리던 남매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불과 나흘 뒤에 베를린의 국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각각 스물 다섯과 스물 둘이라는 꽃다운 나이로 처형되고 말았다. 다른 동료들과 후버 교수도 몇 달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뮌헨대학교는 본관 앞 광장을 ‘숄 남매 광장’으로, 이와 마주보는 광장을 ‘후버 교수 광장’으로 명명해서 이들을 기리고 있다. 대학 기숙사들의 이름도 이때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숄 남매 기숙사’니 ‘빌리 그라프 기숙사’라는 식으로 지어졌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숄 남매가 살았던 집에도 추모 현판이 붙여졌다. 백장미 그룹이 뿌린 삐라는 어떤 위협도 대학의 문을 닫게 할 수 없고 자신들의 투쟁은 참된 학문과 진정한 사상의 자유를 보전하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강서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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