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세계를 동일한 것과 다른 것으로 끊임없이 구분한다. 나는 너와 다르고 남성은 여성과 다르며,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 이처럼 여러 상이한 구분들이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별다른 의심 없이 수용된다.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연한 것은 당연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쉽게 잊혀진다. 나아가 적절한 방식으로 인정되지 않는 다름이 있다면 그것마저 당연하다는 이유로 우리에게서 배제되기까지 한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세계를 동일한 것과 다른 것으로 끊임없이 구분한다. 나는 너와 다르고 남성은 여성과 다르며,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 이처럼 여러 상이한 구분들이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별다른 의심 없이 수용된다.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연한 것은 당연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쉽게 잊혀진다. 나아가 적절한 방식으로 인정되지 않는 다름이 있다면 그것마저 당연하다는 이유로 우리에게서 배제되기까지 한다.

 

  논리학은 사고의 기본 법칙들 중의 하나로 동일률을 정의한다. 동일률은 실제 A와 개념 A가 같다는 것, 즉 우리가 어떤 노란 옷에 대해 대화할 때 개념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옷이 노랗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함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갑자기 그 옷이 검게 된다거나 심지어 없어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동일률을 바탕으로 세계를 경험하게 될 때 놓치게 되는 것은 차이이다. 방금 우리가 노란 옷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을 그 순간조차 노란 옷이 변색될 수 있다는 것을 개념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concept)은 공통된 것(con)을 잡음(cept)으로써 성립하지만, 차이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갓 언어의 문제만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본래적으로 모든 사람을 의미하지만, 과거에 인간 개념에는 흑인과 여성 및 소수자 일반이 배제되어 있었다. 어떻게 모든 인간에 대해 공통되게 말하면서 일부만을 의미할 수 있게 되는가?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의 일부는 차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다는 무능력에 근거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어떤 A(라는 개념의 동일성)와 어떤 B(라는 개념의 동일성)의 차이와 다름이지 차이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차이 자체가 개념적 질서의 배후에 있다고 믿는 것은 헛되다. 이런 헛된 믿음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찾아낸 ‘종적 차이’는 들뢰즈가 보기에 여전히 차이 자체가 아니다. 이것은 차이를 개념에 종속시켜 사고하는 태도를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념적 동일성이 전제되지 않는 한 차이가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차이를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오히려 차이가 현상 세계의 원천임을 주장한다. “차이는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차이는 현상의 본체[누메나]에 가장 가까이 있다.”(475쪽)

 

  들뢰즈의 플라톤 해석은 차이가 어떻게 현상의 원천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플라톤은 세계를 존재론적 위상에 따라 세 가지 심급으로 나눈다. 그것은 각각 이데아와 현상, 그리고 허상으로 구분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현상의 본체는 이데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현상은 이데아의 모방으로 설명된다. 그러므로 현상을 모방한 허상은 자연스럽게 저급한 위치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들뢰즈가 보기에 현상의 본체는 허상, 즉 차이들의 체계이다. 이제 이데아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다른 존재들을 위계화 시킬 수 없다. 오히려 허상으로부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서열을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고, 사회가 추구하는 집단적 질서를 이탈하는 다름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여기서 들뢰즈의 철학적 통찰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먼저 그것은 기존의 지배적 가치들 및 삶의 기준이 더 이상 우선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그동안 평가 절하된 차이들을 기꺼이 마주치라고 말한다. 점차 다원화되는 사회에서 우리가 지닌 편협한 기준들은 더 이상 몸에 맞지 않는 옷일 뿐이다.


/이무영 객원기자 less31@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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