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전의 광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광주 사람들은 주로 무얼 먹고 어떤 음악을 듣고 극장은 또 어디였을까?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이나 졸업하고 난 후 인기 있는 직장은? 그런 질문은 오래된 역사학자들이나 던지는 거라고 멀리하는 풍조가 강하지만 설사 궁금증을 갖는다고 해도 모든 것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으로 수렴되어버린다. 광주는 1980년이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책임자는 아무런 단죄를 받지 않은 채 ‘자연사’하게 생겼고 역사는 아직도 10일간의 비밀을 모두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니 광주의 40년이 오롯이 항쟁의 시공간이었음을 이해 못하는 것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그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광주가 항쟁으로 성역화되고 기념화될수록 보통의 우리같은 사람들의 자리를 돌보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숭고한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사람들의 영웅적인 죽음은 일상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퍼져나가야만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위대한 슬로건만으로 삶을 살아나갈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일상은 문화다. 항쟁 이후 광주사람들의 심리적 충격은 분명 다른 일상을 만들어냈지만 해가 지고 세끼를 먹고 자식들 학교 보내는 일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되었다.

그러나 광주는 지난 40년 또 그 이전의 광주의 문화에 대한 관심도 연구도 많지 않다. 전술한대로 항쟁이라는 강력한 자기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과도한 서울중심의 경제문화가 광주를 무늬만 광주 사람이지 영혼은 서울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광주가 중앙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분수령으로 호명될 때 광주의 청년들은 ‘지잡대’나 다니고 ‘홍어’나 먹는 변방 중의 변방이란 시선으로 수치와 분열의 정체성을 내면화하고 있다. 광주의 무의식은 분명 프란츠 파농이 갈파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처럼 ‘광주 피부 서울 가면’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얼마 전 최유준·장상은의 『모모는 철부지: 전일방송 대학가요제의 기억』(2021, 책과생활)이 발간되었다. 지금 금남로 1가 전일빌딩245에 있었던 지역 독자 방송국(라디오) 전일방송에서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열린 세 번의 대학가요제를 통해 광주발 노래들이 어떻게 전국을 휩쓸었고 항쟁이후 전두환의 언론 통폐합으로 지역문화가 사라졌는지를 탄탄한 연구와 흥미로운 사실들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음악가들은 다른 평범한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향을 활동의 본거지로 삼을 권리가 있다(161쪽)’며 지역문화의 창작-향유-연구에 힘을 기울여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책 내용처럼 광주의 옛 기억이 희망의 주장이라면, 공동저자 모두 전남대 호남학과와 문화전문대학원에서 지역연구와 기획을 하고 있으며, ‘책과생활’ 역시 지역 출판사이자 독립서점이라는 데서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게 한다.

누구나 목도하다시피 지역은 전 세계가 줌(zoom)과 유튜브로 동시대 문화권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중앙의 문화들이 일방통행으로 소비되고 착취하는 구조로 고착되고 있다. 실제 지역소멸을 가속화하는 지방대 구조조정이 중앙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8월 전남대 대학원과 링크플러스 사업단 주최로 줌으로 열린 《페미니즘, 지역, 정치: 빈집의 여성사회문화학》 콜로키움 기조발제에서 권명아 동아대 젠더어펙트 연구소 소장은 지역은 대안주체들을 형성하는데 삼중고, 즉, 지역차별/학력차별/성차별의 악순환 구조에 처해있다며 ‘반차별 소수자 주체 형성’이 지역과 지방대학 소멸에 상상력을 제공할 것이란 제안을 했다. 차별과 억압에 반대하고 소수자들이 소수자들을 품은 항쟁의 기억을 40년 동안 가지고 있는 광주가 더 이상 풀 한포기 나지 않는 황무지가 되지 않기 위해선 바로 항쟁의 정신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만큼 지역을 일구어온 문화와 기억에 대한 돌봄이 필요하다. 돌봄은 각자의 자리에서 창작으로 향유로 비평과 연구로 해낼 수 있다. 그럴 때 광주는 철부지 모모가 집을 떠나지 않고서도 마음껏 꿈을 꿀 수 있는 터무니 있는 우리 모두의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한재섭(씬1980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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