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자본주의 국가로 여겨져 온 미국에서 사회주의 바람이 불고 있다. 1950년대 초반, 미국을 온통 뒤흔들었던 매카시즘의 광풍이 가라앉기 시작했으나, 미소 냉전을 겪으며 사회주의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인식이 우호적일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럽이나 제3세계와 달리 자본주의 중심인 미국에선 사회주의 정치나 운동은 주변적이었다. 더구나 1989년 동구권 몰락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가 공식화된 상징적인 경험도 있다. 그랬던 사회주의가 지금은 희망의 중심 담론이 돼가고 있다고 한다. “2018년 조사에 따르면, 30세 이하 미국인 젊은이 가운데 35%가 사회주의를 선호했고, 그렇지 않은 비중은 26%에 그쳤다. 최근의 조사를 봐도 18세~34세 미국인 중 58%가 사회주의를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버니 샌더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2016년과 2020년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나가 각각 43%, 27%의 지지를 얻었다.”

필자가 대학 신입생이던 90년대 초반, 소위 ‘운동권’ 학생들이 참여한다는 ‘학습’을 아주 잠시 받았다. 다른 친구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직접선거라는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뤄지고 난 후 대학에 입학했기에 운동이라는 거대담론에서 살짝 비켜 있고 싶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 대학 다독다독 독서공동체 모임에 참여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던 것 같다. 모임은 칼 맑스의 저술을 중심으로 예비역 선배가 들려주는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설명을 듣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안타깝게도 가벼운 마음가짐에서 예고하듯 필자의 독서공동체 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우선, 세미나실에서 자본주의 모순을 입으로 설명하는 선배의 모습과 일상에서 몸으로 발현되는 그의 실제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요즘 회자되는 일상의 파시즘 같은 ‘86세대’를 향한 비판담론과 무관하지 않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무엇보다 동구권의 몰락을 경험한 직후에 대학에 입학해서인지 자본주의의 약점과 사회주의의 강점을 강조하던 당시의 학습 풍토가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어리석게도 맑스는 내게서 멀어져 갔다.

독일에서 연구년을 보내며 그와의 만남이 운명적으로 이뤄졌다. 독일 북서쪽 트리어(Trier)에는 칼 맑스(1818-1883)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 박물관은 그에 대한 교조주의 입장에서 정답이나 해석을 제공하지 않고 방문객 스스로 질문하고 의견 및 답을 찾도록 그의 생애, 업적, 동료, 그리고 고난에 대한 정보만을 제공하겠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었다. 19세기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그의 사고와 시각을 21세기 정보혁명 시대에 적용하는데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말일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도 전지구적으로 약탈적 자본주의 문제가 심화되는 이때 그의 정치경제학과 사회비판 의식이 더욱 크게 공명하고 있는 점에 주목했던 기억이 있다.

철학자, 경제학자, 사회과학자, 저널리스트, 사회비평가, 그리고 활동가로서 자본주의 ‘소유’방식에 대한 분석과 비평을 중심으로 그가 제공한 ‘사유’의 지평에 우리는 일정정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맑스를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서두에 언급한 미국에서의 사회주의 부활 조짐도 이러한 사유 지평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최근 우리사회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불거진 공정에 대한 요구가 소유를 위한 자본주의 체제 내 경쟁보다는 사회주의가 주목한 불평등 해소에 무게를 두는 사유의 전환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문헌: 임형두(연합뉴스, 2021년 9월 9일). 극단적 불평등 시대…"미국에서 사회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109090795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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