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블루’라는 용어는 주로 우리나라에서만 즐겨 사용되는 코로나 우울감에 대한 표현입니다. 국제적으로는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특별한 우울감이 확실히 증명된 이후에야 이런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대체적으로 새로운 진단이나 현상을 추가하기를 바라지 않는 보수적 경향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코로나 블루는 의학 용어라기 보다는 저널리즘에서 비롯된 언어라고 하겠습니다. 언론이 각인시킨 용어인데, 그 정의가 모호하므로 그 사용도 모호한데, 코로나 블루에 대해서 말하자고 하면 의학적으로는 애매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사실상 코로나 블루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고 하면 코로나 시기의 우울에 대한 이야기를 그냥 합니다.

코로나 시기에 우울을 겪는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코로나 시기에 우울을 겪는 일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라고 우선 말하고 싶습니다. 21세기 전세계 인류가 느닷없이 겪게 된 (물론 환경 기후 관련 학자들은 예견된 바라고 하지만) 팬데믹 앞에서, ‘침착하게 당황해야 할 일’이 계속 생길 것이라는 철학자 지젝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코로나 블루뿐 아니라 매우 다양한 전대미문의 일들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금 평상시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감염병과의 힘겨운 투병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아주 힘든 시간입니다. 더군다나 감염병의 특성상 확실히 감염되지 않는다는 징표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두가 그 감염병의 대상이기 때문에 안전을 자신할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지금 이 시기가 코로나 시기임을 잊고 지내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은 아주 큰 위기를 겪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상시와는 다른 상황, 다른 기준, 다른 세팅으로 지내야하고 다른 방식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마스크를 써야하고, 손을 더 자주 닦아야하며, 방역 단계라고 하는 국가가 정한 기준에 따라 귀가를 해야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생애 최초로, 이전 문장에 기술한 것처럼 국가가 내 삶을 더 구체적으로 명시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귀가시간을 정하고, 백신의 종류를 정하고, 내출국을 정합니다. 신체의 자유가 구속된 최초의 경험을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선사를 한 것입니다. 아감벤같은 철학자는 이 대목에서 걱정을 합니다. ‘국가가 돌아왔다. 국가주의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걱정을 합니다. 어떤 자유주의자들과 안티백서들은 이 팬데믹 사태가 국가주의자들과 제약회사가 함께 모의하고 작당한 사기적 작태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백신을 팔아먹고 국가의 통제에 대한 권위를 회복하려는 정치적 사기라고까지 주장합니다. 이 이야기들도 매우 우울한 이야기이긴 합니다.

지구를 파괴해서 코로나 팬데믹이 왔다는 환경론자들의 경고 또한 우리에게 우울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운명이 30년 남았다는 MITLab의 이야기나, <총, 균, 쇠>의 저자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조금 더 여유시간을 얹어주어서 40년 남았다는 이야기나 모두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중심주의라는 잘못된 철학으로 지구를 빨리 소모해서 지구는 이제 쓸모없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구법학과 지구중심주의를 이야기하는 지구법학자들도 있습니다.

코로나 블루, 지금 우리가 우울해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청년세대가 우울해질 수 있는 일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 시기 전혀 우울해질 일이 없다는 청년이 오히려 걱정입니다. 지구를 걱정하지도 않고, 지금 벌어진 여러 경제적 어려움과 환경의 어려움도 걱정하지 않는다면 시대와 유리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너무 우울을 떨치려하지 마시고, 약간 우울한 것을 받아들이시고, 그 우울함이 주는 영감과 통찰로부터 우리는 다시 출발을 해야할 것입니다.

코로나가 우리들에게 보여준 것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뤽시는 코로나는 우리에게 확대경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우울로 안내하면서 불평 등, 차별, 독점, 환경파괴, 병적인 산업 구조, 우리 사회의 평상시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회의 전반적 위기가 닥치면 기본소득과 같은 지원이 없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한 기업이 국가의 웬만한 재원보다 큰 재원을 가지고 있고, 마음먹기에 따라 수만명을 취업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알게 되면 약간 우울해지는 것은 지극히 정상일 것 같습니다. 문제는 감염병과 분투하는 동안 발생한 이 우울감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고,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분노할 것인가? 무기력할 것인가? 자해할 것인가? 게임할 것인가? 잠수탈 것인가? 부모에게 매달릴 것인가? 댓글 달 것인가? 술 먹을 것인가? 공부할 것인가? 시험칠 것인가? 모일 것인가? 무엇을 하시고 계십니까?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김현수 교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 서울시 코비드19 심리지원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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