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우리 세대는 마을 초등학교에서 음력 5월 5일 행사를 기억할 것이다. 어린 학생들은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몇 날 며칠 동안 행사 준비에 바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린 아이들에게 가혹했지만 온 마을 사람들이 이 날 함께 모여 아이들이 준비한 각종 덤블링과 같은 퍼포먼스를 구경하고 즐거워했다. 학교 가장자리에 설치된 큰 그네는 하루 종일 쉴 틈이 없었다. 동네별로 나눠 서로 장만한 음식으로 시끌벅적했다. 한복차림의 할머니가 손주의 재롱에 즐거워했다.

그런 행사가 80년대를 거치면서 어느덧 사라지고 기억에서 가물거린다. 그때의 교정을 찾아가보면 그렇게도 넓어보였던 그 자리는 지금에 와서 보니 왜 그리 아담한 사이즈인지를 모르겠다. 넓은 교정이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학교 운동회도 학부모[가족]들 없이 심플하게 치른다고 한다.

전·근대시대는 태양력보다는 음력이 일반적이었다. 숫자는 이념에 가까웠다. 그리고 홀수 숭배 사상이 생겼다. 1월 1일이야 새해 첫날이라는 의미가 있겠거니 하겠지만, 3월 3일과 5월 5일 그리고 7월 7일과 9월 9일 등은 유독 강조되었다.

우리가 서양력을 채택한 것을 을미개혁(1895) 때였다. 일본이 메이지유신(1873)을 계기로 음력 사용을 철저히 금지하고 양력만을 고집한 것에 반해 우리는 양력을 받아들이면서도 음력 사용을 허용했다. 중국은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들어서고야 양력을 도입했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음력도 동시에 사용했다.

그러고 보니까 음력은 오랫동안 동아시아에서 기록의 기제였으면, 시각의 관습이었고, 생활의 방편이었다. 태양의 움직임을 나눠 하루를 24시간으로 인식하고 벽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볼 수 있었던 때가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때에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력의 날짜들은 부모님과 할아버지·할머니 세대의 달력에 꼼꼼히 채워져 기념하고 있었다.

음력 5월 5일은 ‘단오(端午)’다. 한자가 재밌다. ‘端(단)’자는 “시작 단”도 되지만 “끝 단”도 된다. 그리고 ‘午(오)’는 숫자 ‘五(오=5)’의 발음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숫자 5가 처음에도 있고, 끝에도 있는 날짜인 5월 5일이 단오였다. 숫자 5가 겹쳐있다고 해서 중오(重午)일이라고 했다.

굳이 ‘五’를 쓰지 않고 ‘午’를 쓴 것은 시간 개념이 은연중에 스며들어 있다고 하겠다. 하루 중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오전보다 오후가 길다. 午時(오시) 정도에 이르면, 해는 중천(中天)에 떠 있다. 1년 단위를 하루로 치환해 바라보려는 센스가 넘친다. 그래서 단오절을 천중절(天中節)이라고 했다. 1년 중 5월 5일을 기준으로 이후 남은 날들이 더 많다. 하루 중 午時(오시) 이후는 오전보다 일할 시간이 더 많다. 모내기 하고 난 뒤 한 숨 쉬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던 사람들의 자축이며 다짐의 행사였다.

상서로운 날이고, 좋은 날이었다. 한자가 비슷하다. 상서로울 ‘서(瑞)’와 비슷하니 이날은 우리 기억에 좋은 날이었다. 이날 태어난 아이들은 경사로운 축하도 받았다. 그러나 항상 좋은 것에는 시샘이 따른다. 같은 날에 태어나도 어떤 사람은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좋지 않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후삼국시대의 주역이었던 궁예는 바로 5월 5일(重午日)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는 날 지붕 위에는 흰빛이 마치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고 한다. 누가 봐서 상서로운 조짐이다. 만약 그가 후삼국을 통일했다면, 아마도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 구절은 더욱 찬양받았을 것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패자가 되었다. 결국 그가 태어난 날, 이 상서로운 날의 징후까지 왜곡되어버렸다. 궁예가 태어난 날에 일관(日官=미래 예측 관료)이 왕에게,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게다가 세찬 빛무리가 범상치 않았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온 바, 기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왕은 궁중의 사자를 시켜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게 하였다고 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 아이를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후삼국의 주역 궁예로 기억하고 있다.

음력 5월 5일이면 부채를 선물한다. 여름을 준비해야겠다. 

서금석(조선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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