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일 이른 아침 미얀마 수도 네삐도, 한 체육교사가 동영상 경연에 참여하기 위해 촬영하던 에어로빅 비디오 배경으로, 20차선 도로 위에 몰려든 군용 차량들이 잡힐 때만 해도, 이 에어로빅 동영상이 쿠데타 발발상황을 담은 기록물이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더욱이 경쾌한 음악이 아침을 열던 거리에 군과 경찰의 총성이 울려 퍼지고, 통곡과 분노가 뒤덮이는 상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미얀마 의회 앞에서 에어로빅을 하는 여성의 뒤로 군용차량이 지나가는 모습 (Khing Hnin Wai 페이스북 캡쳐)

‘부정선거’에 대한 조사와 재선거실시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감행한 미얀마 군부는 국가행정위원회(SAC)를 설치하고 대통령과 장관들을 새로 임명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100여 일 동안 쿠데타에 저항하는 미얀마인 780여 명이 사망하고 4,900여 명이 구속됐으며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배 당했다. 집계조차 불가능한 난민의 수는 대략 잡아도 5만 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쿠데타 직후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소속 의원들과 정권 인사들이 중심인 ‘연방의회 대표 위원회(CRPH)’가 임시정부 역할을 맡아 초기 시위를 주도했지만 최근에는 소수민족을 포함한 ‘국민통합정부(NUG)’와 ‘시민방어군(PDF)’이 출범하면서 새로운 정부와 동시에 미얀마의 오랜 과제인 연방군의 기반이 만들어지고 있다. 미얀마인들은 이제 단순히 군부에 저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새로운 미얀마 건설을 향한 혁명에 나서고 있다.

▲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는 미얀마 경찰 /사진제공=MPA(Myanmar Preessphoto Agency)

미얀마에서 긴급하게 타전된 군부 쿠데타 소식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군부 쿠데타는 그 자체로 자못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얀마의 역사에서 군부 쿠데타는 빈번하게 출몰해 온 정치적 유령이자 되살아나는 집단 트라우마였다.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2021년 2월의 쿠데타는 미얀마 역사에서 군부 ‘땃마도(Tatmadaw)’가 감행한 세 번째 쿠데타이다.


땃마도는 동남아시아 국가 중 베트남 인민군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군대로, 영국과 일본에 맞선 독립전쟁, 그 후 70여 년 이상 계속된 내전 속에서 ‘전투적’ 성향이 강한 군대로 성장해 왔다. 1962년, 1988년, 그리고 2021년에 일으킨 세 번의 쿠데타는 땃마도 내부의 세대와 권력 교체를 상징하며 동시에 미얀마 사회의 변곡점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쿠데타의 망령이 깃든 땃마도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며 망령을 잠재우는 제의를 준비하는 노력일 수 있다.


1962년 3월 네윈(Ne Win)은 독립이후 최초로 실시된 선거를 통해 구성된 민간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하면서 군부를 미얀마 정치사의 중심에 들여놓았다. 네윈은 미얀마 독립영웅 아웅산(Aung San)과 같이 식민지 시대 군사교육과 독립전쟁의 경험을 통해 성장한 이른바 ‘혁명군인’ 세대를 상징한다. 네윈 중심의 군부독재는 1988년까지 무려 26년 동안 유지되었으며 버마족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버마식 사회주의 정책을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된 병영 국가체제라는 정치적 유산을 남겼다.

1988년 이른바 ‘8888항쟁’을 통해 군부독재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수찌가 민주주의 운동의 상징으로 등장하던 시기, 소마웅(Saw Maung)과 딴쉐(Than Swe)는 다시금 쿠데타를 통해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LORC; 1997년 국가평화발전위원회 SPDC로 변경)를 구성하고 군부독재를 지속해 갔다. 소마웅과 딴쉐 세대는 독립이후 끊임없이 펼쳐졌던 버마 공산당과의 전투를 통해 성장했으며, 분리독립을 지향하는 소수민족 무장세력에 대한 진압작전과 냉전시대 체제경쟁을 경험한 ‘내란진압 군인’ 세대를 상징한다. 땃마도는 미얀마 국가의 수호자이자 국민의 보호자로서 스스로를 규정하고 국가를 운영하고 책임지는 핵심세력이 되었다.

땃마도가 일으킨 이전의 두 쿠데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질곡의 유산을 남겼다. 첫 번째는, 군과 시민사회의 관계에서 군의 예외적 지위, 즉, 군이 시민사회에 개입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한 것이다. 이는 2008년 제정된 현 미얀마 헌법의 주요 조항에 반영되어 있다. 미얀마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민족동맹은 끈질기게 헌법 개정을 시도했지만 땃마도가 의회 의석의 25%를 헌법을 통해 보장받고 있는 상황에서 거부되고 말았다. 현재의 미얀마 군부 쿠데타 세력이 쿠데타의 불법성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헌법에 보장된 땃마도의 권한과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는 논리를 펼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헌법에 근거하고 있다. 두 번째 유산은 군부가 정치뿐 아니라 경제 및 상업 활동 주체로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군부독재가 지닌 막강한 권력은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고 증대하는 데 유리하게 활용됐다. 소수민족 무장세력과의 휴전협상을 통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국경지역을 통해 중국 및 태국 등과의 국경무역이 활발해졌고, 군부와 그들의 가족, 지인들은 권력과 인맥을 활용해 경제 무대에서 활동하게 됐다. 관광, 유통, 주류, 담배, 은행, 광산업을 망라하는 미얀마경제지주사(MEHL, 1990년 설립), 시멘트와 고무 산업과 더불어 최대 통신 회사를 아우르는 미얀마경제공사(MEC, 1997년 설립) 모두 대표적인 군부기업으로, 땃마도의 ‘자금줄’이자 군 관계자들의 재산증식 통로가 되었다. 또한, 증대된 재정을 기반으로 땃마도는 자체적인 교육기관, 병원, 연금제도 등을 가진 자기 완결적 조직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정치-경제적 유산과 전화 과정을 통해 땃마도는 미얀마의 시민사회와 분리된채 독점적 지위를 지니고, 외부질서 변화에 자기중심적 질서로 대응하는 ‘국가 안의 국가’로 작동하게 되었다.

2021년 2월, 세 번째 쿠데타를 감행한 민아웅흘라잉(Min Aung Hlaing)과 소에윈(Soe Win)은, 방위사관학교(DSA)에서 교육받고 직업군인이 된 이들로 변화하는 땃마도의 위상을 직접 체험한 ‘일반 군인’ 세대이자, 시민사회와 관계에 민감한 ‘정치가 군인’의 시대를 상징하는 세대로 간주되었다. 특히, 이들은 새 헌법에 따라 치러진 선거를 통해 2011년 출범한 유사민간정권인 떼인세잉(Thein Sein) 정부가 시도한 일련의 민주화 정책들과 새로운 대외관계 구축 사례들을 접하며 시민사회성장에 대한 정치적 감각을 키워나갔다. 민아웅흘라잉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직접 대중과 소통하며 땃마도와 개인의 이미지를 제고하려는 노력을 활발하게 펼쳐 온 총사령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 이들 세대는 카리스마적 군지도자들과 파벌들에 의해 군부 내 숙청과 권력승계가 진행된 과거와 달리, 이제는 법적 절차에 따르며 그 과정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미얀마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2015년 선거에서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은 땃마도의 자매 정당격인 연방단결발전당(USDP)에 대승을 거두면서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1962년 이후 반세기 이상 미얀마의 권력을 독점해 왔던 군부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유사민간정부를 통해 군 주도의 개혁을 추진했던 실험도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변화된 정치질서 하에서, 무엇보다 당장 전역을 앞둔 군 엘리트들의 미래도 불안해졌다. 새 정부가 출범하던 2016년 초 관련 법에 따라 60세 전역을 앞두고 있던 땃마도 총사령관 민아웅흘라잉은 아웅산수찌와 회담을 가진 후, 전격적으로 총사령관 직책을 5년 더 수행할 것을 발표했다. 민주주의민족동맹과 땃마도의 권력 분점과 협치 가능성에 대한 비관론이 나오는 상황에서 상호 관계의 안정화를 선택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아웅산수찌의 민주주의민족동맹과 민아웅흘라잉으로 대표되는 땃마도와의 관계는 평탄치 못했다. 2008년 헌법에 따라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의 대통령 출마를 제한하는 국적법규정은 아웅산수찌의 정상적인 대통령직 수행 기회를 제한했다. 결국, 국가고문이라는 지극히 예외적인 지위를 만들어 정치에 참여해야 했고, 민주주의민족동맹의 지속적인 헌법개정 시도와 25%의 의석을 할당받은 군부의 반대는 반복되었다. 아웅산수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은 ‘아버지의 군대’인 땃마도를 존중한다는 의견을 표명해 왔고, 실제로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후광을 통해 퇴역군인과 군부 내 인사들과도 교감해 왔다. 그러나 60대인 민아웅흘라잉은 70대인 그들과는 다른 세대의 군인이었다.

2015년 선거 참패 이후 땃마도는 대중적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미얀마 다수종족인 버마족 민족주의와 일부 상좌부불교도들의 반무슬림 정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미얀마의 극단적 민족주의 불교세력인 마바따(Ma Ba Tha)의 성장은 2007년 승려들이 주도한 ‘샤프론혁명’을 군부가 진압한 이후 불교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땃마도에게는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과거 네윈 세대가 반서구 민족주의를, 딴쉐가 반공주의를 활용한 것과 견줄 정도로 로힝야(Rohingya)족에 대한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이슬람 혐오 정서는 국가를 보호하고 질서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땃마도에게 부여했다. 로힝야족에 대한 인권탄압과 학살은 사실상 지난 5년간 미얀마 정치를 뒤흔든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다. 아웅산수찌와 민주주의민족동맹도 이 사안에 관해서는 땃마도와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새 정부가 로힝야족 문제에 방관자적 태도를 보이며 땃마도를 변호하자 국제사회의 여론은 싸늘해졌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미얀마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추앙받던 아웅산수찌는 인권탄압 정치인으로 비판받았고 2019년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열린 로힝야족 집단 학살관련 재판장에 서야만 했다.

미얀마 사회의 정치적 변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감이 식어가고 새 정부에 대한 지지자들이 비판자로 변해갔지만, 미얀마 국내의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정치지도자로서 아웅산수찌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굳건했고, 로힝야족 문제에 관한 ‘가짜뉴스’로 인해 부당한 비판을 받는 수찌를 지켜내야 한다는 포퓰리즘이 온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정치지도자에 대한 팬덤 현상은 새 정부에 기대했던 개혁과 경제발전 정책에 대한 실망과 비판마저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민주주의민족동맹의 1기 정권이 끝나가고 선거를 앞둔 2020년, 땃마도 총사령관 민아웅흘라잉의 지위는 다시 불안정해졌다. 민주주의민족동맹은 선거 압승을 통해 헌법을 반드시 개정하고 땃마도를 의회가 아닌 병영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의지를 공공연하게 표출하며 정치적 자신감을 내보였다. 민아웅흘라잉은 이미 한차례 연장한 은퇴 연령 65세에 가까워졌다. 땃마도 총사령관에게 후계자 문제는 땃마도의 세대교체 및 쿠데타 역사가 보여주듯 정치적 숙청 혹은 사법적 단죄로 이어진 정치보복에 대한 민감성을 불러일으켜 왔다. 과거 군부독재의 시대에는 총사령관이 결정하거나 땃마도 스스로 처리하는 문제였지만, 이제는 법률과 절차에 따라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새로운 민간정부 하에서 군부의 권력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군 관련 사업을 통해 유지해 온 경제적 이해관계 또한 불안정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법률에 따라 대통령이 새로운 총사령관을 임명하기 위한 국방안보위원회(NDCS)를 소집하면 다수 위원을 보장받고 있는 땃마도의 뜻이 관철될 수도 있었지만, 집권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 입장에서는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군 지도부의 변화를 압박할 수 있는 기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민족동맹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민아웅흘라잉에게 보다 현실적인 선택지는 총선에서 연방단결발전당이 선전하여 땃마도에 할당된 의석과 합쳐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면, 의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020년 11월에 치러진 선거 결과 민주주의민족동맹은 의석수를 늘리며 승리하였고, 연방단결발전당은 5년 전 보다도 의석수가 줄었다. 이는 대중 지지의 측면에서 아웅산수찌의 인기와 땃마도에 대한 비호감이 더 강해졌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코로나19가 발생하고 소수민족 무장단체들과 휴전협상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는 일부 지역 선거구에서의 투표가 무산되고 유권자들의 권리가 제한되면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부정선거 의혹과 조사요구를 선관위가 받아들이지 않자, 땃마도는 보다 강력한 어조로 항의하며 선거 불복종을 암시하기도 했다. 선거에서 승리한 아웅산수찌와 민주주의민족동맹은 헌법 개정을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의지를 거듭 표명하며 땃마도와 대립각을 세웠고, 민아웅흘라잉도 땃마도가 개정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고 쿠데타 소문까지 떠돌자 미얀마 주재 각국 대사관들은 땃마도가 선거 결과를 수용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연달아 내놓았다. 국회 개원의 시간이 다가왔고, 땃마도 앞에는 자신들이 반세기 이상 누려왔던 헌법에 보장된 특권을 빼앗길 수도 있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가 누려온 정치·경제적 특권에 대한 개혁이 임박해오자 이번에는 민주주의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고 폭력의 질서를 복원하는 주체로서 땃마도에 깃든 쿠데타의 망령을 불러냈다.


새 정권이 출범했던 2016년, 정년을 연장하고 아웅산수찌와 손잡았던 민아웅흘라잉은 권위주의 통치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염원했던 ‘아랍의 봄’이 결국 실패했던 사례가 미얀마에서 반복되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각오를 밝혔다고 전해진다. 그가 정확하게 어떤 의미에서 ‘아랍의 봄’을 이해했는지 쿠데타 주모자가 된 현재의 시점에서는 더더욱 가늠하기 어렵지만, 혹시라도 땃마도가 ‘미얀마의 봄’을 주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우려스러울 따름이다. 쿠데타 이후 미얀마를 방문해 땃마도 지도부를 면담한 유엔 특사의 전언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미얀마 군부 제재 가능성을 전달하자 땃마도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며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반면, 쿠데타를 감행한 군부가 진정 놀란 것은 과거와는 다르게 끈질긴 저항이 젊은 세대에 의해 지속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땃마도가 세대교체를 거듭해 오며 특권을 유지해 오는 동안, 미얀마 민주주주의 새로운 주체들도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데타 직후부터 시작된 시민불복종운동(CDM)은 미얀마 전역에서 땃마도의 폭력적 진압과 학살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고, 이 운동을 이끄는 이들은 다름 아닌 미얀마의 청년세대들이다. 이들은 과거 미얀마 민주화 운동과 반군부독재 투쟁을 펼쳐왔던 이른바 ‘88세대’, ‘샤프론 혁명 세대’ 등과도 차이가 있고, 정치는 국회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네삐도 신드롬’에 빠진 관료화된 민주주의민족동맹의 정치가들과도 결이 다르다. 이들은 전 세대가 이루지 못한 미얀마의 각 민족, 종교, 계급간 차이를 넘어선 연대도 이루어내고 있다. 또한, 땃마도의 폭력에 맞서 싸우며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두려움 없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시민방위군(PDM)에 자진 입대하고 있다. 폭력과 테러, 쿠데타의 망령에 사로잡힌 스스로의 역사를 벗어나지 못한 땃마도는 미얀마의 새로운 세대가 지닌 열정과 잠재력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땃마도는 스스로가 헌법에 새겨넣은 권리헌장처럼 미얀마 역사의 주체이거나 수호자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 멈출 수 없는 ‘미얀마의 봄’ 혁명의 주역은 땃마도가 아닌, 미얀마의 새로운 세대, 청년들이다.

“우리는 결코 굴복하지 않으리,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우리는 역사를 만들었네, 우리가 흘린 피로. 혁명!!!”
- 미얀마 민중가요, “이세상이 끝날때까지” (Kabar Ma Kay Bu) 中  

 
▲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미얀마 국민들 /사진제공=MPA(Myanmar Preessphoto Agency)
▲ 심주형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HK+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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