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유일한 목표는 판결이며, 그것은 진실과 정의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 점은 심지어 부당한 판결조차도 판결의 효력을 지니는 데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자들』중 -

권경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1991, 봄>(2018)은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쫒는 작품이다. 그 사람의 과거는 동지의 자살을 방조하고 그 자살마저도 혁명에 이용하기 위해 동지의 유서를 대신 쓴 야만이었다. 야만을 행했다는 댓가로 감옥까지 다녀온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현재는 기타를 유일한 말동무 삼아 피아졸라를 연주하는 음악이었다. 그리고 감옥에 다녀온 지 24년이 지나서야 무죄판결을 받은 간암환자였다.

누가 야만이었을까?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의 명예는 회복되지 않았다. 명예는커녕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란 추켜세움도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뿌리 끝까지 파괴해버린 사건 앞에선 ‘그 따위 말장난’으로 전락해 버린다. 프랑스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에밀 졸라라도 있었지만 우리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김지하의 추락을 목도하기까지 했다.

그것뿐인가. 1987년 6월 항쟁은 위대한 민주주의의 빛나는 여정으로 기록되지만, 1991년 5월 항쟁은 아직도 ‘분신정국’ 이란 패배와 자학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이다. 뭐, 그렇다 치자. 87년의 주역들이 기성 정치권에서 ‘내로남불’의 로맨스를 즐기고 있을 때, 91년의 주역들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1년 살아남은 사람들이 30년 동안 맞이했을 봄을 시들게만 내버려 둬도 되는 일일까.

91년 5월 항쟁은 87년 이후 사회 모든 부문에서 실질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변혁운동으로 그 해 4월 26일 명지대 강경대 열사의 경찰 폭력진압에 의한 사망, 그리고 3일 후 전남대 박승희 열사 분신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된 투쟁을 가리킨다. 1991년은 87년 대통령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임에도 노태우의 당선으로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었고 정권은 공안통치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열망을 짓누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강경대 열사 이후 불과 한 달 만에 제 목소리를 갖지 못한 학생과 노동자, 빈민 11명이 몸에 불을 지르고 허공에 몸을 던졌다.

특히 광주에서는 ‘운암대첩’이라 불리며 5월 18일부터 20일까지 강경대 열사의 도청 앞 노제를 막는 당국에 맞서 운암주공아파트와 문화예술회관 인근에서 격렬한 저항을 하며 경찰 저지선을 뚫어냈다. 2박 3일동안 주공아파트 주민들은 시위대가 굶고 있다는 소식에 김밥과 물을 가져왔고, 이불과 빈 병 등을 모아 함께 저항했다. 결정적으로 치료 중이던 박승희 열사의 사망소식이 19일 전해지며 분노한 시민들을 더 이상 막아낼 수 없었다. 운암대첩은 1980년 오월공동체의 재현이자 승리였다. 하지만 한 편으론 학생운동의 낙관적 정서가 강하게 자리 잡으며 변화하는 현실로부터 유리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사람들의 기억까지 무죄로 지워지진 않았다. 무엇보다 노태우 정권의 연장을 위해 죽은 사람의 유서까지 기획조작한 김기춘, 강신욱, 곽상도, 남기춘 등 판검사들과 자극적인 기사로 여론을 조장한 언론들은 모두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지금도 끝나지 않는 야만의 시간을 건너가고 있는 그 사람은 이제 말한다.
“시시하게 한 번 살아 보세요”

아이러니하게 무고한 사람들을 자극적인 기사와 이미지로만 기억하는 이는 같은 힘없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법과 진실을 독점하려는 자들의 시시한 속임수와 위장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미지와 기사로 만들어진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만든 사람들이어야 한다. 특히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그럴 때, 1991년 봄 사라져간 사람들과 같은 보통의 몫 없는 존재들의 삶이 시시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 한재섭(「씬1980」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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