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오월, 공수부대의 학살에 맞서 광주시민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섰듯이 91년 오월 역시 다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특히 광주에서의 싸움은 아주 격렬했는데 다른 이들과 달리 박승희는 전남대병원에서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박승희는 병상에서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을 챙겼고, 방문객들에게 5ㆍ18을 잊지 말자고 말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달라고도 했다. 대학생들은 낮에는 전경들과 싸웠고, 밤이면 전대병원 바닥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대자보와 유인물,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 광주 곳곳에 붙였다. 종점으로 가던 버스가 길을 돌려 대학생들을 태우고 전대병원으로 왔다. 기사는 토큰도 받지 않았다. 시민들은 집에서 쌀이며 김치를 가지고 와 대학생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농민들은 오이며 배추를 트럭 가득 싣고 왔다. 곳곳에서 자연스레 시민대토론회가 벌어졌다. 80년 오월의 전남도청처럼 90년 오월의 전대병원에서 항쟁의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정권의 잔인한 진압에 끝내 서울시청노제를 하지 못한 강경대의 운구가 18일 저녁, 광주로 왔다. 정권은 서광주IC에서 강경대 운구의 광주진입자체를 막아 나섰지만 광주시민들은 수천발의 최루탄에도 흩어지지 않고 무박2일간 투쟁을 했다. 그러다 19일 낮, 모두가 지쳐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박승희가 끝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누군가의 지시도 명령도 없었다.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고, 결국 강경대의 운구가 광주 진입에 성공했다.

25일 진행된 박승희의 장례식은 20여만의 애도인파 정권은 감히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고, 박승희의 장례행렬은 전남대 정문에서부터 도청 앞까지 끊이지 않는 장관을 이뤘다. 눈물마저 국가폭력에 의해 멈춰야했던 야만의 시대. 금남로를 다시금 해방의 공간을 만들어 낸 셈이다. 이렇게 91년 오월광주는 80년 오월을 재현했다. 전남도청은 전대병원으로, 금남로는 운암동으로, 주먹밥은 김밥으로.
만일 전남대학교를 ‘민주화의 성지’라 부를 수 있다면 전남대가 야만의 시대에 앞장서 싸우며 해방의 공간을 만들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애도 받지 못한 죽음이 너무 많다. 바로 얼마 전에도 스물세 살의 노동자가 300kg의 철판에 깔려 죽었다. 스물다섯의 김재순, 스물넷의 김용균, 열아홉의 구의역 김군 등 많은 이들이 산업재해로 죽어갔다. 방송가의 노동착취를 고발한 스물여덟의 이한빛, 군이 쫓아낸 스물두 살의 변희수 하사, 복지사각지대로 생을 마감한 송파의 세 모녀.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숱한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장애인, 빈민, 성소수자들. 무엇보다 세월호의 유가족들은 여전히 진상규명을 외치며 거리에 서있다.

박승희는 유서에서 당부했다. ‘슬퍼하고 울고 있지만은 말아라.’ 열사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면 과거의 일을 추모하는 것을 넘어 지금, 여기의 죽음과 슬픔들에 연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전남대 민주화운동의 역사이다.  

▲ 김태현(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 사무국장/ 철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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