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편지를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꾹꾹 눌러쓴 손편지를 좋아하는 편이라, 소중한 사람들의 생일이 다가올 때면 늘 편지지를 꺼내 들곤 한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편지의 말미를 장식하는 꼬리말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바로 ‘행복’에 대한 것이었다.

“내 행복만큼 네 행복을 빌어, 어떤 형태를 갖든 네 감정의 끝이 늘 행복이었으면 좋겠어, 항상 행복만 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늘 전해주고 싶었던 말들이었다. 그만큼 행복이란 존재를 무수히 떠올렸고 또 갈망했다.

행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 무렵부터였다. 1월 1일을 경계로 내게 쥐여진 성인이라는 이름표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졌다.

처음엔 어른스러운 사람이 되겠다는 이유로 내 감정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주어진 선택권을 늘 주위 사람들에게 양보했으며, 다른 이들의 선택에 고개를 저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갔다.

스스로를 2순위로 밀어내버린 결과는 비참했다. 점점 자신에게 각박해지기 시작했고, 나를 위해 시간과 돈을 할애하는 게 모두 낭비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던 날들이 있었다. ‘진짜 나’를 숨기고 살아가는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찝찝했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생일에 받은 편지 모퉁이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힘들었던 모든 순간에 함께 해 준 친구의 편지였는데, 일 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나는 글이다.

“네가 행복만 했으면 좋겠어. 어떤 방향으로든 또 어떤 방식으로든.” 이 문장을 읽은 순간 깨달았다. 내 지난 고민들의 궁극적인 이유가 ‘행복’이라는 목적의식의 부재에 있었음을 말이다. 좋은 사람이라는 주위의 평가, 친구들과의 원만한 관계 그 어떤 것도 완벽한 답이 될 수 없었던 것은 그것들이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충분한 함숫값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벌며 또 매순간 행복을 좇으며 살아간다. 어찌 보면 삶의 이유가 행복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눈앞의 행복을 놓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놓치기도 하고, 필자처럼 주위의 시선 따위에 목매며 스스로 행복의 끈을 놔버리기도 한다. 정작 자신의 행복은 챙길 줄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일만큼 모순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행복해지는 방법은 간단해요. 좋아하는 것을 더 자주 하고 싫어하는 것을 덜 하면 됩니다.’ 언젠가 마주친 글귀인데 제법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자주 되새기는 말 중 하나다. 맞는 말이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지만, 행복을 사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아는 것. 즉,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바로 보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시작점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이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진지하게 떠올려주었음 한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수많은 행복을 되뇌고 있었던가, 혹은 놓치고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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