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인문대 1호관 모습

전남대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인문대 1호관”이다. 인문대 1호관은 조형미가 뛰어난 신고전주의적 건축물로 용봉캠퍼스에 우뚝 솟아 대학 캠퍼스로서 위용을 자랑하는 상징적 건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개교 초창기인 1954년 11월 13일 최상채 총장과 학생들이 현 인문대 1호관 자리에 모여 성대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이 기공식은 문학부 합동강의실(현재의 인문대 1호관)·법과대학·공과대학·중앙도서관·대학본부·대강당·식물원·종합운동장을 건설하겠다는 종합 건설 기공식이었다.

기공식이 거행된 후 1년 만인 1955년 12월 25일 문학부 합동강의실이 준공되는데, 이 건물은 벽돌을 쌓아 올린 3층의 연면적 3,989㎡으로 당시 건물 규모로는 보기 드문 큰 건물이었다. 문학부 합동강의실은 광주 출신의 건축가 정옥진이 설계하였으며, 3층의 본채와 양 옆 1층에 날개처럼 덧달아낸 대강의실 등 모두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중앙에는 첨두형 아치로 출입문을 만들었고 장방형 창과 원형 창, 아치 형상의 창문을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외관은 붉은 벽돌로 마감하였고, 중앙 현관 출입문을 통해 건물 내부로 진입하게 하고 남북 방향으로 복도를 두어 통행하게 하였다. 한국전쟁 뒤 물자와 인력이 부족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학교 당국은 용봉캠퍼스 내에 자체 벽돌 공장을 건립하여 필요한 벽돌을 제작했는데 이때 학생들이 직접 벽돌을 손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 합동강의실 신축(1955년)

강의실 19실, 교수연구실 16실, 휴게실 2실, 급사실 1실 등 모두 38실로 구성된 이 건물은 초창기에는 문학부 합동강의실로 사용하다가 문리대 이학부 건물이 준공되고 각 단과대학 1호관이 건립된 1960년대 초중반부터 인문사회과학관, 문리대 문학부, 문학부강의실, 인문대 1호관으로 불리게 된다.

인문대 1호관의 첫 명칭인 ‘문학부 합동강의실’은 당시 교내에서 가장 큰 공간으로 졸업식, 개교기념식, 각종 공연 등 대규모 행사가 치러지는 곳이었다. 건물 완공 후 가장 먼저 개최한 행사는 1956년 3월 28일 거행한 2회 졸업식이었다. 1963년에 어학연구소가 개설되면서 1층에 40석 규모의 어학실습실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 어학실습실은 1988년 어학연구소가 도서관 별관(백도) 뒤편에 별도의 독립건물을 마련하여 나갈 때까지 운영되었다.

▲ 합동강의실 신축(1955년)

인문대 1호관 건립 공사 시 많은 어려움이 발생했다. 예산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건설 공사를 추진하다 보니 지불해야 할 돈을 제때 주지못해 건설업자들이 농성을 하는 일도 있었다. 용주마을 주민들이 민속 신앙 대상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공사를 반대하기도 했다. 지금 인문대 1호관이 들어선 자리에는 원래 칠성바위가 있었는데 이곳은 아이를 낳지 못한 아낙네들이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학교 측에서 이 칠성바위를 불도저로 밀어 버리려고 하자 용주마을 주민들이 완강히 반대하여 불도저 앞에 누워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캠퍼스 부지 곳곳에 묘지가 산재해 있었는데, 이묘지들을 이장시키는 과정에서 묘주들이 최상채 총장 사택에 몰려가 항의했다고 한다.

인문대 1호관은 건립 당시 총 2층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최상채 총장이 서방 방면에서 학교 쪽을 바라볼 때 문리대 건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설계를 변경하여 3층으로 짓게 했다고 한다. 당초 설계와 달리 1개 층을 추가 증축했기 때문에 안정성이 문제가 되었고, 건물 하중을 줄이기 위해 3층 교수연구실의 칸막이를 각목과 합판으로 만들어 방음이 잘 되지 않아 교수들의 소음 민원이 발생하였다. 건물 안에 화장실이 없어 3층 교수회의실에서 근무하는 교수들이 건물 밖의 화장실을 이용하는 등 큰 불편을 겪기도 했다.

인문대 1호관 건물은 누수 발생, 방음, 조명 불량 등의 문제가 자주 발생하여 수시로 부분적 보수가 이루어졌다. 1973년, 1975년 지붕의 개·보수 작업이 진행되었고, 1976년부터 1995년까지 총 4회에 걸친 창호 보수, 1997년에는 인문대 1호관 건물 내부의 천정과 바닥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 1957년 5회 졸업식과 합동강의실 모습

1996년 학교에서 실시한 건물 안정성 조사에서 인문대 1호관이 ‘철거’의 판정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건물 철거 문제가 논의되었다. 대학 본부는 2003년 4월에 인문대 1호관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인문대와 경영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교사를 새롭게 짓는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몇몇 교수들이 인문대 1호관의 상징성과 역사성 등 문화재적 가치에 주목하며 건물 안정성 조사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존치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하였다. 철거 반대를 위해 교수들은 50여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대학 본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대학 본부는 인문대 1호관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짓거나 건물을 보존하고 예산을 반납하거나 양자택일을 요구하였고, 교수들은 투표를 통해 건물을 보존하고 예산을 반납한다는 쪽을 선택하였다. 본부에서는 절충안으로 건물의 앞부분은 보존하고 뒷부분은 철거하여 새 건물을 짓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던 중 문화재청에서 인문대 1호관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요청이 접수되었다. 대학 본부는 오랜 논의 끝에 철거 주장 측과 보존 주장 측의 청문을 거쳐 등록문화재 지정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고, 드디어 2004년 9월 4일 인문대1호관이 등록문화재 96호로 지정되었다.

▲ 합동강의실 상량식 고사(1955년 11월 3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라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한 인문대 1호관은 2005년 20억을 들여 리모델링을 시작하여 2006년 1월 13일에 재개관을 마쳤다. 재개관한 인문대 1호관은 인문대 각 학과 및 교양과목 강의실, 교수연구실, 인문대 각 연구소, 대학원 세미나실, 독서실, 대학원 정독실, 학술회의실로 사용되고 있다. 2019년 5월 3일에는 인문대 1호관 내에 김남주 시인 기념홀을 개관하였다. 반독재·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故김남주 시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작은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처럼 인문대 1호관은 개교 초창기부터 문학부 합동강의실로 교사의 역할을 시작했으며, 75년이 지난 지금까지 학문 탐구의 장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개교 초창기 문학부 합동강의실로 사용되었던 인문대 1호관은 오늘도 변함없이 강의실로 사용 중이다.

<참고문헌> 전남대 50년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전남대학교 60년사, 전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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