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으로 느껴지는 단어 ‘소통’. 그래서인지 이 주제가 심도 있게 다뤄지는 게 때로는 물릴 때도 있다. 그저 마음 터놓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일상에서 골치 아픈 문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소통이란 끝없이 새로운 유형과 상황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할 만큼 만만치 않은 활동으로 보인다.

소통을 위해 우선 타인과 관계 맺는 주체인 ‘나’를 먼저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감정과 가치관을 기반으로, 어떤 의도를 담아 타인에게 목소리를 전하는지 뚜렷이 인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외로움을 다루는 법, 고독을 즐기는 법에 대해 고민해봤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과도한 외로움보다도 미미한 고독일지도 모른다. 내면에 널브러져 있는 갖가지 생각이나 응어리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표면적으로 이루는 소통이 과연 건강할까? 어쩌면 이것이 타인과의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가장 가까운 존재인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나름대로 해석하며 스스로 위로를 건네야 한다.

또 선의의 거짓말이나 우회적 표현 등 소통에 사용되는 기술을 나에게 적용한다면 어떨까? 스스로 그 의도를 이미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기술을 자신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하루에도 몇 번씩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이나 합리화를 하고 산다. 중요한 건 그것의 적정선을 인지하여 유익할 수 있는 정도로 활용하는 것이고, 그 대상이 타인이기 전에 ‘나’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주체인 ‘나’가 소통할 준비가 됐을 때 비로소 그것이 원활하게 이뤄질 가능성을 얻을 거라 믿는다.

타자를 독립적인 개체로 바라보아야 함을 느낀다. 특히 가까운 누군가에게 종종 친밀함을 이유로 실수하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예를 들어 “나를 위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어야지” 식의 생각이 반영된 행동이다. 이때 과한 기대나 집착을 품고는 실망적인 결과를 맞게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욕구가 채워지지 못할 시,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든지 “내가 너한테 얼마나 해줬는데” 식의 서운함이 관계에 등가성을 들이댈 수도 있다고 느낀다. 애초에 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소통이란 활동에 등가성을 적용하는 게 가능한 걸까? 물론 소통에도 서로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이뤄져야 하지만 이는 순전히 자발성에서 기인해야 한다고 본다. 애초부터 무언가를 얻을 요량으로 소통을 하는 게 아니라 그 관계와 소통 자체에 집중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말투보다는 내용에 집중하고 성격이 아닌 관계를 중시하면 어떨까? 한 발짝 물러나서 상대를 대하고, 전체적인 숲을 바라보듯 관계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상대에게서 내가 원하는 것을 꾸역꾸역 찾으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나에게 유익하고 도움을 주는 건강한 소통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 서로 간에 신뢰를 쌓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도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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