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희 열사는 1972년 4월 12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열사는 주변 사람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착하고 예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 뜻을 굽히지 않는 의로운 고집을 지닌 여학생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성당을 다니며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는 세심한 사람이었다.

 

▲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어머니와 성당 앞에서

1987년, 목포 정명여고에 입학한 박승희 열사는 YMCA 활동을 하면서 친구들과 사회문제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1989년에는 참교육 실현을 기치로 내 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출범하면서 정명여고 66명의 교사 중 30명이 전교조에 가입해 자주적 참교육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정부에서는 전교조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자 선생님들은 철야농성을 벌이게 된다. 학생들도 목포시내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자주교육쟁취교육연합’ 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교조 선생님들을 응원했지만, 전교조 선생님들은 해직이라는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참교육을 외치던 스승들이 교단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보던 박승희 열사는 고등학교 3학년 중간고사를 보던 날 “선생님들은 전교조에 가입해서 탄압받고 있는데 우리는 시험만 치르고 지켜만 보면 되느냐”며 중간고사를 거부하고 학우들에게 선생님들을 우리의 손으로 지켜내자고 가슴 절절하게 호소했다. 열사의 이러한 활동과 전교조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선생님들은 다시 교단에 설 수 있게 되었다.

▲ 고등학교 1학년 담임 구신서 선생님과 함께

1990년 전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한 박승희 열사는 과 대의원과 용봉편집위원회 수습위원으로 활동했다. 열사는 매일 편집실 청소를 도맡아 했으며, 자취하는 선배와 동기의 빨래를 해주기도 하고 자신의 우유와 점심을 가져와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는 등 친근하고 정겨운 선배이자 후배였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강경대 학우가 시위 도중에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무자비하게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91년은 노태우 정권 시절로, 민족민주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지던 시기였다. 그러나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이에 굴하지 않고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전개했고, 반민자당, 노태우 정권 퇴진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시위에서 대낮에 사람이 사람을 무자비하게 때려죽이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명지대학교에 재학중이던 강경대 학우는 선배가 경찰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에 참여했는데 백골단은 강경대 학우를 표적으로 삼고 무자비하게 쇠파이프를 휘둘러 사망하게 된다.

강경대 학우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날, 박승희 열사는 밤새 눈물로 지새우며 친한 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 세상이 참 무서워, 신문에 나온 것처럼 불감증의 시대야. 최루탄에 맞아 눈이 실명돼도 학우들은 겨우 몇백명 모이고... 정말 친구들에 대한 사랑이 너무 적어. 명지대 학생도 마찬가지겠지. 어떻게 백주대낮에 사람이 사람을 때려 죽일 수가 있을까.”

1991년 4월 27일, 열사는 많은 고민과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분신을 결심하고 유서를 작성했다. 자신의 몸을 불태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가슴을 뛰게 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려놓는 분신을 결심하고도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평소처럼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며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에서 열사가 분신을 결심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4월 29일 아침. 엄마가 신을 사 신으라고 쥐어준 돈으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에게 줄 넥타이와 편집실 후배에게 줄 초콜릿, 생일을 맞은 선배에게 줄 책 선물과 꽃다발을 들고 편집실에 들어섰다.

29일 오후, 5.18 광장에서 ‘강경대 살인만행 규탄 및 폭력정권, 살인정권 규탄 결의대회’ 집회가 시작되고 한 시간 쯤 뒤, 옛 대학본부(현 용봉관) 뒤쪽에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 2만 학우 단결하라!”를 외치며 자신의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임 박승희 열사. 병원으로 후송되면서도 끝까지 “노태우 타도”를 외쳤다.

1991년 5월 19일, 시대의 모순에 온 몸으로 저항한 박승희 열사는 21일 간의 병상 투쟁 끝에 마지막 길을 떠났다. 그 날은 광주에서 운암대첩이라 불리는 17시간의 투쟁 끝에 강경대 열사의 노제가 열리던 날이었다. 온 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밀려드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을 잊지 않고 선물을 챙기던 너무나 고왔던 박승희 열사, 자신을 치료해준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동의보감 소설책을 선물하며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던 열사가 결국 생을 마감했다.

박승희 열사는 ‘힘들고 괴롭더라도 나를 생각하며 힘차게 전진하라. 내 서랍에 코스모스 씨가 있으니 2만 학우가 잘 다니는 곳에 심어주라. 항상 함께 하고 싶다“는 유서를 남겼다. 열사의 뜻에 따라 공대 언덕길에 ’승희 꽃밭‘이 조성됐으며, 2018년 7월 정문 느티나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 학내는 민주길 조성 공사가 한창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올 겨울은 제대로 된 눈 한번 내리지 않는다. 겨울이 다 가기 전에 함박눈이 듬뿍 내려 올 가을에는 코스모스 천지 ”승희 꽃밭“을 제대로 보길 소망해본다.


※ 참고문헌: 박승희 정신계승사업회 홈페이지

※ 2019년 3월부터 연속 게재되었던 전남대 역사 연구회의 ‘전남대 역사 속의 인물’기획이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2020년 3월부터는 새로운 기획‘전남대 역사를 찾아서’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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