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이란 노래의 가사입니다. 노래를 듣는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미쳐버린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런 건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야 하는데 묘하게도 오래 남았습니다. 생존을 걸고 싸우는 전쟁터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미쳐버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식으로.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나치의 절멸수용소라는 극한의 공간에서도 아이의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아버지에 대한 영화입니다. 누군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숭고한 사랑의 힘을, 무차별한 폭력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위대한 인격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무엇이 한 가족의 삶을 저렇게 처참한 상태로까지 몰아붙였나?”하는 의문이 필요해 보입니다.

한국사회는 저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 누구도 저런 극한의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지금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갑니다. 아무래도 전자에 가깝습니다.

19세기에는 노동하지 않는 사람을 정신이상자로 취급하고 보호소에 감금했습니다. 풍부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통치방식이었습니다. 7살 아이까지도 노동시장에 편입시켜 12시간씩 일을 시켰습니다. 경작할 땅을 잃은 사람들이 적응해야 할 새로운 자연이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의 자연은 다릅니다.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경쟁은 필수가 되었고, 거쳐야할 교육기간은 늘어났습니다. 일정한 실업자군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만 이익이 극대화되는 방식으로 시스템은 발전했고 이제 실업자군의 사이즈는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실업의 증가가 사회의 입장에선 위기일 수 있지만, 기업의 입장에선 위기가 아닙니다. 대체 가능한 노동력이 풍부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일자리는 밥이라서 자유이고 인권이며 시민권입니다. 불행하게도 한국 사회에서 청년이 바라는 좋은 일자리는 단 10%뿐입니다. 나머지 90%는 흔히 말하는 나쁜 일자리에 속합니다. 이미 광주 청년의 절반가까이는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졌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좋은 일자리 10%를 두고 벌어지는 경쟁이 모든 청년의 삶을 매 순간 짓누르고 있습니다. 90%는 10%의 삶을 욕망하고 그 잣대로 자신을 깎아내리며 힘겨운 시간을 보냅니다. 교육에서 노동으로 이행하는 기간은 길어지고 있고 체감 실업률은 오래전부터 20%를 넘어섰습니다. 5명중 1명은 말하지 못하는 괴로움으로 이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밀실에서 나오지 않고 혼자 지내는 청년이 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의 상태는 결코 좋다고 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청년층 사망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이런 극한의 상태에 내몰리지 않게 사회의 방향을 바꿔보자고 말해야 할 때 아닌가 싶었습니다.

광천 터미널 버스 승강장에 서서 ‘졸업’을 듣고 있습니다. 건너편에 높이 솟은 신축 빌딩 하나가 바꿔놓은 기괴한 도시풍경을 보고 있어선지, 노래에선 냉소적인 절박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앞에는 앳된 청년이 조금 어색해 보이는 새 양복을 입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래 탓인지 순간 묘하게도 불쑥 떠오르는 말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입니다. 복잡한 심정으로 졸업하는 청년에게 단지, 오늘은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임명규(철학과 대학원 2016년 졸업 · 광주 트라우마 센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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