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6월 27일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우리의 교육지표>를 공동 발표한다. 이 사건은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학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더욱 강화되는 시기에 참담하기만 한 교육현장에서 지각 있는 교수들이 떨쳐 일어나 학원의 민주화, 인간화, 그리고 조국의 자주·평화·통일을 위해 헌신적으로 실천 투쟁할 것을 밝힌 것이다.

<우리의 교육지표>에 서명한 11명의 교수들은 우리 시대 실천하는 지식인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그중에서도 영어영문과 명노근 교수는 부인 안성례 여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위해 헌신한 광주의 대표적 민주화 가족이다.

명노근 교수는 1933년 1월 5일 광주 출생으로 전남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은 후,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 전남대 조교로 근무를 시작하여 1965년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발령받았다. 상아탑의 평범한 학자였던 명교수가 지식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송기숙 전남대 교수와 함께 1978년 이른바 ‘교육지표 사건’을 주도하면서부터이다. 국민교육헌장을 전체주의의 도구라며 통렬하게 비판하고 인간화 교육을 주창한 당시 선언은, 박정희 독재에 시달리던 국민들로부터 ‘경이로운 양심의 결단’이라는 지지를 얻었다.

이 사건으로 전남대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가 복직하면서 명노근 교수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 깎겠다”는 굳은 의지로 턱수염을 기르게 되었고 이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명노근 교수는 광주 YMCA 간사에서 시작해 전국 YMCA 연맹 이사장까지 지낸 한국 YMCA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979년 광주 YWCA 구국기도회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또한 1980년 광주항쟁 당시 송기숙 교수와 함께 시민수습대책위원을 맡아 ‘내란중요임무종사죄’로 또 다시 옥살이를 했다.

광주 보안대에 끌려간 송기숙 교수와 명노근 교수가 당시 김대중 선생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강요당하며 고문 받을 때 서로 틀린 액수를 말해 다행히 사형선고를 피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1980년 5월 전남대 교수평의회 부의장이던 명노근 교수는 교수들을 설득해 평화적 학생 시위에 교수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접수한 5월 21일 이후 시민수습대책위원을 맡아 평화적 해결에 노력하다 항쟁이 진압된 뒤 내란중요임무종사죄로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84년 학원 자율화 조치로 전남대 영문과 교수로 다시 복직했고, 전남대 교수평의회의장, 교수협의회장을 역임했다.

수차례의 연행과 구금, 두 차례의 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명노근 교수는 부인 안성례 여사와 다섯 아이들을 곱게 키운 아버지이기도 했다. 딸들에게 잔심부름 한 번 시킨 적 없고, 반찬 타박을 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검소했던 그는 혼자 있어도 즐거워하고, 남들과 함께 있으면 더욱 즐거워한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

명노근 교수의 부인인 안성례 여사는 1980년 5월 광주기독병원 간호감독으로 계엄군의 폭력에 다쳐 실려 온 시민들을 돌보는 등 ‘오월의 어머니’로 통한다. 또한 광주 시의원으로 일하며 ‘전국 최초 3선 여성시의원’이라는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당연시했던 명노근 교수는 ‘5·18 광주민중혁명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과 5·18기념재단이사를 맡아 활동하면서 5·18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고 민중 항쟁으로서 위상을 정립하는 데 힘쓰시다 2000년에 심장마비로 작고하셨다. 민주화의 큰 별,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명노근 교수는 우리 후배들에게 양심 있는 교수, 존경할만한 스승의 본을 보여주신 큰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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