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떨어져 가지 말자...(중략)...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고” 민중투쟁이나 촛불집회에서 자주 듣는 아주 익숙한 노랫말이다. 이 노랫말을 쓴 사람은 바로 우리 대학 출신인 김남주 시인이다.

시인 김남주는 1945년 전남 해남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입시 위주의 획일적인 교육에 반발하여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했고, 1969년 검정고시로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 3선 개헌을 반대하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전국에서 최초로 반유신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했다. 이듬해 <함성>의 제호를 <고발>로 변경하여 전국에 배포하려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면서 대학에서 제적된다.

1974년 <창작과 비평>에 ‘잿더미’,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발표, 문단에 데뷔한 후 작가 황석영 등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1978년 가장 강력한 반유신투쟁 지하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에 가입했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철학과 문학, 사회과학, 경제학 등 폭넓은 독서와 고민, 연구를 바탕으로 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문학과 사상, 세계관을 완성해 갔다. 1984년 수감 중 첫 시집 <진혼가>가 출간되었는데, 여기에 실린 시들은 그가 감옥 안에서 우유팩에 날카롭게 간 칫솔대로 눌러 써서 감옥 밖으로 몰래 내보낸 것들이었다.

1988년 12월 그는 형집행 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는데,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곳곳의 문인들이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결의문과 서한을 노태우 정부에 발송하여 얻어낸 결과였다. 이듬해 그는 옥바라지를 한 남민전 동지 박광숙과 결혼했다.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이 되었으나 1992년 건강이 악화되어 사퇴한 뒤 췌장암으로 고생하다 1994년 사망하여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시인 김남주는 한국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사회변혁 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나간 '전사(戰士)시인'이며,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문단을 일깨운 '민족시인'이다. 또한 불꽃같은 청춘 10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등 반독재 투쟁에 가장 앞장 선 '혁명시인'이었다.

우리대학에서는 김남주 시인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5월 3일 인문대 1호관에 김남주 기념홀과 기념공간을 마련했다. 근대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인문대학 1호관 강의실을 다목적 기념 강의실과 기념공간으로 조성한 것이다. 1층 벽에는 시인의 연보가 있고 강의실 후면 벽 전체에 시 ‘조국은 하나다’가 새겨져 있다. 이 시를 읽다보니 삐거덕거리는 북미회담, 아베의 경제적 보복으로 일본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요즈음, 가슴속에 숨겨놓은 애국심이 솟아 오른다. 우리들의 위대한 선배 김남주 시인의 시가 더욱 더 그리운 시절이다.

나는 이제 쓰리라 / 사람들이 오가는 모든 길 위에 / 조국은 하나다라고 / 오르막길 위에도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 사나운 파도의 뱃길 위에도 쓰고 /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도 쓰리라 / 밤길 위에도 쓰고 새벽길 위에도 쓰고 /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 / 조국은 하나다라고.

- ‘조국은 하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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