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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부문 가작> 일말상초2019 전대신문문예작품현상공모 단편소설 부문 가작
이현철(신문방송·16)  |  news@cnumeda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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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20  10: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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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말상초
이현철(신문방송·16)
 
그녀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지 7일이 지났다. 하루 이틀 정도야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일주일이나 연락이 끊긴 건 이번이 처음이라 마음속이 불안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연기처럼 기어올랐다. 내일도 연락이 닿지 않으면 어떡해야 하나. 나는 깊은 걱정에 몸을 뒤척였다. 아무래도 내일은 무언가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인가. 전화는 그녀가 받지 않는다. 그녀는 이메일도 페이스북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편지. 하지만 문자 메시지를 보내도, 전화를 해도 안 되는데 편지라고 다를 수 있을까. 혹시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으로 괜히 관자놀이만 아파왔다. 나는 양손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좀 더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크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 거야. 그녀가 변했을 리는 없어. 난 그녀를 믿으니까. 단지 조금 바쁜 것뿐인데, 내가 군대에 있으니까 연락할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아서 그런 거야. 내일은 아마 그녀가 먼저 수신용 전화기로 연락을 할 거야.
그때, 옆 자리에서 후임의 손이 날아들었다. 꿈결에 몸부림치는 녀석은 강한 힘으로 내 아래쪽 배를 가격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혼잣말로 욕설을 뱉으며 내 배 위에 놓인 녀석의 손을 치웠다. 후임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 녀석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나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그냥 다시 누웠다. 맞은 자리가 생각보다 얼얼했다. 그 때문에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모포 밑에서 뒤척여야 했다.
그녀가 보인다. 그녀는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예쁘게 꾸몄고, 나는 이제 막 휴가 나온 군인처럼 칼라 태극기를 붙인 군복차림이었다. 복잡한 버스터미널의 출구를 나서자마자 그녀가 나를 껴안는다. 아주 오랫동안 못 봐서 서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사람처럼, 마치 나를 전장에서 생환한 영웅처럼 반겨주는 그녀가 나는 반갑고도 새로웠다. 우리는 익숙한 상대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기쁨과 놀라움을 잠시 미뤄두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동안 필요로 했던 안정을 갈구하며 잠시 가만히 서있었다.

지금의 나는 어제의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다. 일상이 되어버린 행복 속에서 그것을 행복이라 느끼지 못하던 사람에게 주어진 시련은 그 사람이 다시 일상을 되찾았을 때의 만족감을 배로 늘려주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터미널을 나갔다. 수십, 수백 번은 더 본 거리의 풍경이지만 길가에 늘어선 가게 하나하나마다 새롭게 눈길을 끌었다. 나는 잠시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거리를 둘러보고는 그녀와 함께 택시를 탔다.
어느새 나는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택시는 집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지만 나는 그녀와 함께 카페에 앉아있었다. 그녀 앞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딸기 스무디가 놓여있었고 내 앞에는 카푸치노가 있었다. 그녀는 전화를 하고 있었고 그전까지 우리는 무슨 얘기를 하고 있던 것 같지만 어떤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택시에서 언제 내렸는지, 요금은 얼마나 나왔는지, 옷은 대체 언제 갈아입은 건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이 장면을 내 눈 깊숙한 곳에 새겨 넣고 언제라도 꺼내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손을 뻗으면 사라져버릴 것처럼 두려워서 나는 아무것도 만질 수 없었다. 내 앞에 놓인 카푸치노 잔마저도.
다만 조심스럽게 이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을 실현시키기에 이 현실은, 비눗방울처럼 조그맣고 연약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지켜주고 싶은, 함부로 보존하려다 이 모든 것들을 깨뜨려버릴 것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가만히 앉아, 통화하며 이따금 딸기 스무디를 마시는 그녀만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전화하면서 가끔씩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얼마간 정(停)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윽고 내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앞이 깜깜해졌다.
 
내가 기상나팔 소리와 동시에 잠에서 깼을 때, 이미 햇빛은 창문 밖으로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꾼 것처럼 어제 잠을 얼마 못 잔 것치고는 매우 개운했다. 온 몸의 피가 새로 도는 기분이었다. 창밖의 날씨도 내 기분처럼 맑았다. 어제 일기예보에서 분명히 비가 온다고 했지만 비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일기예보라는 건 틀리기 마련이니까. 맑은 날씨 덕분인지 내 기분도 더욱 상쾌했다. 왠지 오늘은 그녀가 내 전화를 받을 것 같은 기분 종은 예감이 들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간단하게 세면을 하니 어느덧 아침 점호집합시간이 나가왔다. 나는 재빠르게 환복을 하고 연병장으로 나갔다. 부대 주변에 심어진 나무들은 새벽이슬을 머금은 채, 마치 오늘 아침 햇살이 올해 처음으로 맞이하는 햇빛인 것처럼 싱그럽게 반짝였다. 점호를 받은 후 가볍게 담당구역 청소를 실시했다. 그리고 아침밥을 먹으러 갔는데 평소보다 미역국의 간이 잘 맞았다. 정말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양치를 하고 다시 한번 세면을 했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날은 거의 오지 않기에 이런 시간을 소중하고 신중하게 보내야 한다. 지금 상태의 내가 못 하는 일은 앞으로의 평범한 혹은 안 좋은 기분일 때 역시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거품이 묻은 곳이 남아 있나 확인하며 거울을 봤다. 어젯밤 사이에 자란 턱수염이 약간 거슬렸다. 면도 크림을 고르게 펴 바르고 면도를 했다. 면도 역시 평소보다 깔끔하게 잘 된 것 같다. 역시 지금이 기회다. 아직 일과시간까지는 30분가량 남아있다. 나는 얼른 나라사랑카드를 꺼내 들고 부대 앞 전화박스에 들어갔다.
카드를 한 번 긁고 난 이후 천천히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녀가 자기 할 말을 다 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는 기회가 없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010-XXXX-XXXX. 열한자리의 숫자를 누르고 나니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두르르르, 한 번, 두르르르, 두 번, 두르르르, 세 번. 원래 이 시간에 세 번 만에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다. 여기가 군대니까 그러지 나만 해도 입대 전에는 대학교 수업 시작하기 직전에나 일어나지 않았는가. 조금 있으면 그녀가 내 전화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익숙한 목소리로 내게 항상 하던 것처럼 인사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동안 왜 전화를 못 받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사과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간다. 이 사건은 훗날 나 혼자 간직하는 작은 해프닝으로 기억될 것이다. 두르르르 두르르르.

하지만 그 후의 신호에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내가 바란 것과는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내 간절한 마음을 그녀의 벨소리에는 담을 수 없었던 걸까. 다시 한 번 전화를 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은,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이번에도 받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낙담한 채 전화박스를 나섰다. 내 눈가를 따사롭게 적시는 햇살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소대장님께서 오전에는 다 같이 창고를 정리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일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일하는 내내 손목시계만 자꾸 쳐다보며 적당히 정리하는 척만 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내 뇌를 좀먹고 있었다. 나는 창고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입구에 놓인 책상과 더불어 창고 안에 쌓인 수없이 많은 물품들 위에는 두꺼운 먼지가 얹혀 있었다. 그리고 박스나 사람 손 같은 것들이 그 위를 지나가면서 저마다 얕은 생채기를 새겨놓았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책상 위의 먼지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 눈앞에 마치 영화관 스크린을 통해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떨어지는 영상이 펼쳐졌다. 먼지 위에 생채기가 쌓여 생긴 흔적들이 데생으로 그린 초상화처럼 하나의 형상을 갖추어 가고 있는 것이다. 눈을 다시 한번 감았다 떠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형상은 더욱 선명해져 여자의 얼굴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그녀.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득 그녀에게 상처를 줬던 일이 생각났다.

그게 작년 3월쯤이었을까. 그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나와 그녀는 오랜만에 서로 시간을 내서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었다, 평소 영화를 즐겨보지 않는 나는 그녀에게 모든 스케줄을 내맡기고 약속한 날짜가 다가올 때까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점점 귀찮은 마음이 들었고 결국 나는 그녀의 전화가 올 때까지 샤워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잊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미리 전화라도 하지 그랬냐고 말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보채지 않았다. 영화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그녀는 뒤늦게 씻고 옷을 갈아입는 나를 말없이 기다렸다. 그녀는 미리 내가 늦을 것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 때의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어쩌면 그녀가 영화표를 예약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우린 그 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후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그 동안 그녀는 내게 한 마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평소보다 말수가 적고 휴대폰을 보는 시간이 길었다. 그리고 이따금 다른 사람과 통화를 했다. 그녀는 헤어질 때쯤에서야 내가 항상 네 옆에 있는 건 아니야, 라며 말했을 뿐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화난 것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쓸쓸함이 묻어났다. 나는 내가 약속이 다른 날인 줄 알았고 만약 오늘이란 걸 알고 있었다면 일찍 준비를 마쳤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언질조차 주지 않은 그녀도 잘못이 있다고 변명했다. “그래, 네 말이 맞겠지. 하지만 너도 다른 사람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해.” 이게 내가 그날 그녀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그 후로 그녀는 2~3일 정도 계속 바빠서 나와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전혀 나지 않았다. 내가 보낸 문자나 전화 역시 전혀 답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바쁘나 하고 나는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그녀와 만났을 때 나는 그녀에게 사과했다.

왜 갑자기 이 생각이 들었을까. 그녀에게 심한 행동을 했다는 건 그 당시에도 알고 있었지만, 다시 떠올려보니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이지만 그녀에게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녀가 먼저 사과부터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수십 번씩 시계를 쳐다보며 얻어낸 점심시간에도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그녀를 꽤 오랫동안 보았지만, 이 시간에 그녀가 휴대폰을 손에서 놓고 있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다. 그녀는 왜 전화를 받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통화할 때 퉁명스럽게 굴어서? 짜증 내서? 어떤 설명도 명쾌한 해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믿고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그런 사소한 것들은 이 대전제 앞에서 아무런 위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하나의 가능성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 쪽에 문제가 있다 .그녀가 사정이 생겨서 못 받는 것이든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인해 안 받는 것이든 그녀가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안하려고 했지만 자꾸 생각은 그쪽으로 쏠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다면 미리 알려주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생겼더라도 그녀만큼은 나를 잊었을 리 없다. 그녀는 내 전화를 의도적으로 안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안 받는 것인가. 도저히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알 수 없었다.
복잡한 사고의 한 켠에서 먼지 한 톨 만한 의구심이 일었다. 내가 그녀를 믿는 것만큼 그녀가 날 사랑하지 않는 건가. 아니 반대일 수도 있다. 일단 의문을 품자 그것은 곧 홍수처럼 불어났다. 그동안 그녀에게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단지 이 이유 때문이라면 이제 와서 이럴 리 없다. 항상 그녀의 기대에 못 미쳐서? 이건 좀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첫 만남 이후 지금까지 나는 항상 그녀를 실망시켰고 그녀는 항상 나를 믿어줬다. 물론 처음으로 그녀에게 실망을 안겨줬던 날 나는 엄청난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잠을 설쳐야만 했다.
하지만 이것이 일종의 메커니즘 화(化)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을 하고 그녀에게 사과하면 그녀는 날 용서했다. 그녀는 나를 다시 믿어줬고 나는 또다시 그녀를 실망시켰다. 말하자면 우린 일종의 기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무딘 칼날로는 아무것도 베지 못하듯 무뎌진 감정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이런 상태는 고착화됐고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왜 필요한지 설명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타개해준 것은 군대였다. 닳고 닳은 감정이 마모되어 헛돌아가게 되기 직전, 나는 입대했다. 그 사실 하나로 우린 마치 살얼음이 낀 바다에 도끼질이라도 한 것같이, 지난날 쌓인 감정들을 뒤로하고 원래의 감정, 원래의 기억,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가 일방적으로 파기시켜버렸던 계약서를 다시 작성한 것처럼, 우린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서로에 대한 역할 중 긍정적인 부분만을 이행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입소하던 날,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조용히 울었다.

이런 관계인만큼, 게다가 시간도 어느 정도 지난 만큼, 그녀 가슴 속에 남아있던 파편들이 유빙처럼 흘러 그녀의 심장 쪽에 자리 잡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도 납득할 수 있다. 그녀는 내가 바뀌길 바랐지만 나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이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자 오히려 답답할 정도로 머릿속에 그녀만 가득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가슴 한 구석에 불편한 감정을 쌓아둔 채, 저녁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기분 나쁜 두통만이 그녀의 잔상과 함께 생각의 찌꺼기처럼 남아있었다.
오후에는 소대장님께 의무대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두통이 심해 무언가에 집중할 수가 없어 아스피린이라도 받을 작정이었다. 전우조를 해주는 동기의 어깨를 끌어내리다시피 붙들고 의무대로 향했다. 오늘따라 부대 안의 도로가 유난히 길어 보였다. 연병장에 몇몇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린 채 연병장에서 눈을 돌려 하늘을 보았다. 아무도 없는 새벽의 길거리처럼 차갑게 식어있는 하늘을 보니 곧 비가 올 것만 같았다. 그 밝던 햇빛은 다 어디로 간 걸까. 태양은 구름을 두껍게 발라 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비가 안 왔으면 했는데, 아침에는 분명 비가 안 올 것 같았는데, 내 바람은 강풍 앞에 놓인 들꽃처럼 흔들렸다. 내 발걸음도 그에 보조를 맞추듯 비틀거렸다.

힘겹게 내딛은 걸음으로 의무대에 도착하니 그 안에는 꽤 많은 사람이 이미 와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어떤 사람이 내게 문진표를 작성하고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팔을 무릎에 걸치고 고개를 숙였다. 몸이 아프니까 그녀가 더 간절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아팠던 일이 기억난다.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으니 아마 작년 1월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둘 다 겨울에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주로 실내에서 만나곤 했다. 그리고 그날은 오랜만에 내가 그녀의 집으로 갔던 날이었다.
내가 살을 에는 추위를 뚫고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제 막 씻고 나온 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외출할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나가지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내가 신발을 벗으며 왜 씻었냐며 물어보니 그녀는 그냥, 이라고 말하고 드라이기를 작동시켰다. 나는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방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노란 전기장판에 등을 지지며 게임을 하고 있으니, 마치 내 집인 것처럼 편안했다. 시끄럽던 드라이기 소리가 어느 샌가 잠잠해졌다.

몇 판 게임을 하고 나는 그녀에게 집에 먹을 거 없어, 라며 물었다. 그녀는 다른 일을 하고 있는지 방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냉장고에 찾아봐, 하며 짧게 대꾸했다. 느슨해진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가보니 역시나 그녀는 조그마한 부엌에서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뭐해?” 그녀는 힘든 듯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이따 먹을 거.” “그럼 기다릴까?” “아냐, 배고프면 조금 먹어도 돼. 이거 양 적어.” “조금 도와줄까?” “괜찮으니까 조금 이따 나와.” 나는 그녀를 조금 지켜보다가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며 전기장판 위에 누워 껐던 게임을 다시 켰다.
한창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나를 그녀가 갑자기 불렀다. 나는 어떤 이상한 점도 눈치채지 못하고 누운 상태에서 크게 “이 판만 하고 나갈게.”라고 말했다. 그녀가 다시 나를 불렀다. 내 말이 잘 안 들렸나 하는 생각에 나는 더 큰 소리로 금방 나간다니까 왜, 하고 대답하고 게임을 껐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면서 문득 그녀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직감에 사로잡혔다. 방문을 열고 부엌을 보니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파. 그녀의 목소리가 창문에서 바람 새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스스로 봐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침착하게 행동했다. 내 몸의 움직임이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어디가 아픈데, 라고 물음과 동시에 그녀의 손이 배를 감싸고 있는 걸 목격했다. 그녀는 배, 라고 말하고 난 후 즉시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병원에 가보자, 하고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처음 있는 일인데도 마치 일상적인 일인 것처럼 부드럽게 그녀를 부축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녀는 내게 몸을 기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그녀를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 난간에 앉힌 후 콜택시를 불렀다. 아픈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무뚝뚝하게도 핸드폰으로 시간만 자꾸 확인했다. 시간이 가지 않는다. 택시는 3분 안에 온다고 대답했지만, 과연 제시간에 도착한다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눈이 내리고 있다. 아무리 겉옷을 입었다 해도 아픈 그녀에게는 너무 춥지 않을까. 1분이라는 시간도 내게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핸드폰을 다섯 번은 족히 들여다보았지만 화면 속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가만히 서서 초조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스무 번도 넘게 애꿎은 휴대폰 액정만 노려보고 있었을 때, 마침내 택시가 도착했다. “한국병원으로 가주세요.” 택시는 어지럽게 흩날리는 눈발을 가로질러 달렸다. 기사님은 무슨 말을 걸어볼까 하는 눈치였지만 나와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그에게 빨리 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창밖을 보고는 그저 가는 도중 사고만 안 났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택시는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안에 들어서서 그녀를 응급실 침대에 눕혀놓은 다음 뭘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멍청하게 그녀의 옆에 가만히 서있는데 한 간호사가 다가와서 입원 수속을 밟았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그녀가 알려주는 대로 간단한 입원 수속을 마쳤다. 그녀의 침대로 돌아와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녀는 잠에 빠진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피로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세게 틀어놓고는 여러 번 거칠게 세수했다. 그러고 나서 세면대를 팔로 짓누르며 거울을 쳐다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얼빠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바보 같은 얼굴을 보고 있으니 조금씩 현실감이 되돌아왔다. 얼굴은 추운 날씨 때문에 조금 창백했고 머리는 거센 바람 탓에 반쯤 산발이 되어있었다. 나는 손으로 머리를 간단히 정리했다. 턱에 매달린 차가운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나 잘한 거 맞지?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 눈동자는 바닥에 으스러지는 물방울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화장실에 있는 휴지로 얼굴을 대충 닦고는 그녀 곁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디 갔었어?” “화장실 잠깐 갔다 왔어.”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아픈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끔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더 잘한다면 그녀에게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녀가 아픈 것도 모르고 지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배고프지? 집에 있는 거 데우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그 말이 참 서러웠다. 내가 뭐라고. 도대체 내가 뭔데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를 신경 쓰는 것일까. 안경에 김이 서리듯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지금 나는 그녀와 떨어져 지내야만 하는 걸까. 정말 미치도록 그녀가 보고 싶다. 한 번만 이라도, 사진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 때, 내 상념을 뚫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감정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그리고 큰 소리로 대답한 뒤, 목소리가 알려준 진료실에 들어갔다. 군의관님은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시고는 일단 두통약을 받고 증상이 심해지면 다시 찾아오라고 하셨다. 나는 의무병에게 하얀 약봉지를 받아들고 의무대를 나갔다. 같이 온 동기는 내가 앉아있던 사이 PX에 다녀온 듯 하얀 봉투를 들고 있었다.

저녁 개인정비시간이 되자마자 내 발걸음은 사지방으로 향했다. 비록 이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않겠지만 나는 내 계정에 올려져 있는 그녀와의 사진을, 그녀와의 추억을 되새겨보고 싶었다. 함께 걸었던 길, 함께 갔던 장소, 여행, 바닷가. 우리 기억은 내 SNS에 ‘나만 보기’로 설정돼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사진들이 우리 둘만의 추억으로 남기를 바랐던 건지 아니면 굳이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듯 떠벌리고 싶지 않았던 건지, 어찌 됐든 난 그저 처음 사진을 올릴 때 그렇게 설정을 했었고 지금도 그대로 하고 있을 뿐이다.
가장 먼저 찾아본 사진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녀와의 가장 오래된 추억이다. 내가 태초의 사과를 따기 전, 순수했던 관계. 사진 속 우리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본 제주도에서 나는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했고 그녀는 지금도 충분히, 내겐 과분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봄기운이 만연한, 포근하고 나른한 날씨, 주변에 만발한 꽃, 파란 하늘, 그 가운데 손을 잡고 서 있는 우리. 그 시절 그녀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녀 외의 다른 사람을 알지 못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으면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고 그녀 품에 안겨있으면 온 우주를 가진 것만 같았다. 멀리 보이는 제주도의 바다는 내 꿈과 환상을 자극했고 내가 그렸던 미래에는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돼버렸을까. 문득 꿈에서 깬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그녀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어떤 실수도 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다. 그녀가 변치 않길 바랐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변해버렸고 그녀가 나의 변화를 바라기 시작한 순간, 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코트의 마지막 단추를 잠글 때쯤에서야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을 알아챈 사람 같았다. 이걸 내가 바로잡을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케케묵은 기억들 사이에서 그것을 헤집어가며 첫 번째로 잘못 끼워진 단추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을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놔두면 안 될까. 하지만 만약 그러면 언젠가 그녀와 이별해야 하는 날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때 다른 사진이 내 눈에 들어왔다. 겨울에 바닷가, 사진 속 우리는 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내가 이미 여러 번의 실수와 그릇된 판단을 한 이후이다. 그녀와 나 사이에 대화다운 대화는 오가지 않던 시기이자 서로 연락을 안 한 게 며칠이나 됐는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그녀가 뜬금없이 내게 여행을 가자고 했었다. 나는 거절했지만, 그녀가 나를 억지로 데려갔다. 귀찮은 마음에 대충 시간을 때우며 하루 종일 휴대폰만 만지고 있었기에 추억은커녕 지금까지 한 번도 떠올린 적 없었다. 그저 어렴풋하게 몹시 추웠고, 아무것도 없었다고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른 사진들 틈에 끼어 우연히 같이 올라온 이 사진에서 나는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겨울, 있는 것이라곤 고작 강풍과 물, 모래, 그리고 추위가 전부인 그곳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며 웃었던 것일까. 반면 옆에 서 있는 나는 무심한 듯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 있었다.

이 두 장의 사진, 두 명의 사람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내가 놓친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찾기 위해 앨범에 들어가 모든 사진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나만 있는 사진. 그녀만 있는 사진, 나와 그녀가 함께 있는 사진. 이 모든 사진들을 보고 나자 그 차이는 더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항상 웃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그녀의 얼굴들 중에서 웃고 있지 않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얼굴은 점점 더 표정을 잃어갔다. 너무나 확연한 차이 때문에 지금껏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사진들은 나와 그녀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말해줄 뿐 그 원인에 대한 것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생각을 해야 한다. 처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다른지. 비록 모든 게 변했더라도 그 속엔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해선 안 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야 한다. 그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첫 번째 단추이다. 나는 개운함과 찝찝함을 동시에 느끼는 묘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갑자기 현기증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뒤틀리고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나는 다리가 풀려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전화, 편지, 문자. 아무것도 내게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나마 방법이 있다면 편지뿐일까. 아니 방법이 있다 하기 보단 그저 내 간절함이 더 잘 전해질 수 있는 것일까. 편지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다 전해줄 수 있고 그녀가 일부러 피하는 것만 아니라면 결국에는 그녀가 읽게 될 것이다. 또한 전화를 피하는 것이라고 해도 편지 정도는 읽어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써야 하는가. 무조건적으로 용서를 빌어야 되나. 아니면 조금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다고 해볼까. 아니, 먼저 그녀가 갑자기 왜 날 피하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어떤 식으로 글을 써야 하는지 정할 수 없었다. 결국 이런 것은 임시방편이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해결방법을 찾는 것이다. 나는 지금이 아니면 절대로 그 방법을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일단 내가 변해야 한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어떻게? 언제까지나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안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연락이 되는 그날, 그녀에게 평소와는 다른 말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나 혼자 노력한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를 전부 해결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녀가 내게 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이 아닐까.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바라는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나도 처음엔 그녀의 바람을 전부 다 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건 너무나 어렵고 또 끝이 없었다. 나도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야. 단지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아주 조금씩, 내가 하면 좋은 혹은 해야 하는 일들을 방치해둔 것일 뿐이다, 그 선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범람하는 강물처럼 흐릿한 경계선을 이리저리로 넘어 다니다보니 홍수가 온 마을을 쓸어가 버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녀 역시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 그녀가 아주 조금만 일찍 만족할 줄 알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주 조금만 일찍 포기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내 역량을 넘어서는 기대는 나에게 압박으로 다가왔고 나는 나를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찾기 위해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했다. 그러므로 그녀가 나를 민 것이다. 그녀가 나를 밀었다면 그리고 내가 하필 그때, 절벽 앞에 서 있었다면 그녀는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비록 그 절벽이 내 눈에만 보이며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더라도. 내가 그녀를 위해 그 절벽을 다시 올라갈 필요는 없다.

그때, 누군가 내 심장을 빨래처럼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나는 울렁이는 마음을 최대한 가다듬어보려고 노력했다. 사실 알고 있잖아. 무엇이 문제인지.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지만, 심장이 자꾸만 도망치려고 한다. 나는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 나는 화난 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날카로운 바늘로 내 가슴 속 깊은 곳을 찌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폐가 타는 듯이 아파왔다. 숨을 쉬는 게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동시에 바닥이 치솟아 내 눈앞을 덮쳐왔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더니 이내 까맣게 변해버렸다.
 
나는 바닷가에 서 있었다. 제주도의 청명한 태양이 나를 비춰주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꽃밭을 걸어갔다. 그녀는 어떤 연예인이 와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정말 예뻤다. 그녀는 노란 유채꽃들의 한 가운데에서 나와 함께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옆을 지나가던 아저씨께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분은 곧 우리에게 큰 소리로 숫자를 불렀고 우리는 그분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곳에 언제까지나 서 있고 싶었다. 이렇게 그녀와 함께, 그녀의 손을 잡고.
그런데 어디선가 살을 찢는 바람이 내 몸을 관통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맞잡은 손을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어느새 나는 패딩을 입고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 대신에 차갑고 딱딱한 핸드폰이 손가락의 감촉을 통해 느껴졌다. 너무 춥고 피곤해서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나를 불렀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인지 창백한 얼굴에 붉어진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나가던 행인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그 사람은 대충 한 번 사진을 찍더니 핸드폰을 건네주곤 바로 가버렸다.

눈을 뜨니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사지방에 앉아있었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나는 내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강하게 문지르며 통증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혀보려 했다. 하얀 커튼에 하얀 침대, 방 반대편 끝에 놓인 화분, 그리고 내 손목에서부터 타고 올라가는 링거까지, 나는 여기가 어딘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두통은 조금 가벼워졌으나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고 멍하게 느껴졌다. 내가 언제 병원에 왔지.
그때 문득 그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고 싶었던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는 날 떨어뜨린 적이 없다. 부정하고자 했던 사실을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다시 음미했다. 나는 나 자신의 나태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욕심 때문에, 나 자신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합리화할 핑곗거리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햄릿이라도 된 척했던 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지금까지 잘못한 모든 것을 만회하기 위해,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나를 온전히 사랑하고 믿을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내 가슴 속의 찝찝함이 씻겨 내려갔다. 머리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때마침 소대장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짧게 내 이름을 부르더니 몸은 좀 괜찮아, 하고 물었다. 나는 그 말에 대답을 하고 내가 왜 병원에 있는지 물어보았다. “너 어제 사지방에서 갑자기 쓰러졌었어. 기억 안 나?” 나는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까지밖에 모르겠다고 답했다. 나는 소대장님께 전화 한 번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내가 갑자기 꺼낸 질문에 소대장님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내 얼굴을 잠깐 살펴보더니 이내 내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오랜만에 만지는 휴대폰이었지만 나는 전혀 어색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그래서 가끔씩은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눌러버리고 마는 번호. 나는 손이 떨리는 것을 붙잡고 최대한 신중하게 그녀의 번호를 눌렀다. 두르르르, 두르르르, 찰칵. 전화기 너머로 그토록 바랐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마침내 그녀를 부른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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