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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민주화를 열망하던 정의로운 선배, 윤상원 열사■전남대 역사 속의 인물 ④
전남대 역사연구회  |  news@cnum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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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3  16: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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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을 연주하고 있는 윤상원 열사의 생전 모습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에 맞서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다.

광주 시민들은 신군부 세력의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로 발생한 헌정 파괴·민주화 역행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계엄군의 무차별 구타와 폭행에 분노한 시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으며, 계엄군은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여 평범한 광주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기 시작했다.

광주 시민들은 무기고를 털어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과 전면 대치했으며, 5월 25일 계엄군이 무조건 무기반납을 요구하자, 시민군의 대변인 윤상원은 무기반납을 반대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5월 27일 새벽 1시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하자 윤상원은 무기를 나눠주며 마지막 연설을 했다.

“여러분 우리는 저들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우리가 싸워온 그동안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이 새벽을 넘기면 반드시 아침이 옵니다.”
 
윤상원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개원이며, 장성한 후에 윤상원으로 개명했다. 우리 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후 연극반 동아리에서 극예술에 심취한다. 연극을 통해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를 탐구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뇌했다.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졸업 후 노동운동을 하려 했으나 1978년 주택은행에 입사해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 은행은 높은 연봉에 정년이 보장된 선망의 직장이었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암흑시대, 돈을 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서인지 취업 반년 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내려온다.

광주로 내려온 윤상원은 고졸 출신으로 학력을 위장해 광천공단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 하루 10시간씩 트럭에 짐을 싣고 내리는 힘든 노동의 연속이었다.
   
▲ 윤상원 열사와 영혼결혼식을 올린 박기순 열사
이곳에 또 한 명의 위장 취업자가 있었다. 스물 두 살의 꽃다운 여성 박기순이다. 박기순은 전남대 국사교육과 3학년 재학 시절 ‘교육지표 시위 사건’으로 강제 휴학을 당한 후 위장 취업해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야학 운동’이야말로 현실에 입각한 노동운동이라는 박기순의 말에 공감한 윤상원은 바로 들불야학에 합류했다.

야학운동은 들불처럼 번져갔다. 유신독재 말기의 폭압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노동자들의 누이’ 박기순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상원은 일기장에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이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돼 가슴속에 피어난다”고 기록했다. 훗날 노동 운동가 윤상원과 박기순은 ‘혼령의 부부’가 된다.
 
윤상원은 1980년 5·18 당시 계엄군이 광주 시내 대학에 주둔하자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광주 외곽으로 도피시켰다. 이후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고립되고 언론이 통제 당하자 5·18의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들불야학 강학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만들어 배포했다. 광주항쟁 후반부에 학생수습위원회에서 새로 편성된 항쟁지도부(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을 맡은 윤상원은 5월 26일 외신기자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며 끝까지 투쟁할 것을 밝혔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공격하자 윤상원은 이에 맞서 싸우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는 1980년 5월 28일 시청 청소차에 실려 망월시립묘역에 가매장되었다. ‘관번호 57, 검안번호 4-1, 묘지번호 111’이다.
 
1982년 2월 20일, 들불야학 시절 먼저 세상을 떠났던 박기순 열사와의 영혼 결혼식이 거행됐다. 이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되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바쳐졌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소설가 황석영이 시민사회운동가 백기완의 옥중지 <묏비나리>의 일부를 차용해 가사를 썼고, 당시 우리 대학 재학생이던 김종률씨가 작곡했다.

5·18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5·18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었고 반민주, 군사독재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다.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항쟁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으며 그 중심에 정의로운 선배, 윤상원 열사가 있었다.

우리 대학은 윤상원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사회과학대학 중앙정원에 기념조형물을 세웠다. 우리 대학 미술학과 출신 최은태 작가가 조각한 이 조형물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 역할을 했던 윤열사가 양손을 맞잡고 고뇌하는 모습의 흉상과 윤 열사의 사진, 약력, 1980년 5월27일 새벽 발표한 마지막 연설문이 새겨진 비석으로 이뤄졌다. 또한 올해 5월 2일에는 열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사회과학대학 본관 1층에 윤상원 열사 기념홀을 개관했다.

가슴 뜨거워지는 5월, 5·18민주화운동 역사를 겪지 않은 후배들은 민주화운동에 목숨을 바친 정의로운 선배 윤상원 열사를 꼭 기억해야 한다. 아니 우리 모두 길이길이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위대한 선배다.

※ 참고문헌 : 5·18기념재단, 『한국기자협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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