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역사연구회]는 전남대 직원들로 구성된 연구·학습모임으로 2014년부터 대학의 숨겨진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용봉탑에서 경영대로 올라가는 언덕 초입부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동상이 눈에 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캠퍼스 전경을 바라보는 이 동상의 주인공은 전남대학교 최상채 초대 총장이다.

최상채 총장은 1903년 장흥 출신으로 경성의전에서 외과학을 공부했다. 1941년부터 경성여의전에서 교수로 재임했고, 1945년 해방 후 광주에서 의전 설립이 본격화되면서 고향인 전남으로 귀향하여 광주의과대학에서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초대학장으로 재직했다.

전남대 개교를 준비하던 이을식 전라남도지사는 총장 인선과정에서 광주의과대학 최상채 학장의 인재됨을 알아보고 문교부에 전남대 초대 총장으로 추천했다. 최상채 총장은 1952년 4월 초대 총장으로 취임 후 열성과 집념으로 전남대학교의 창설 작업에 헌신하여 대학 기반이 튼튼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최 총장은 강의실 하나 없던 허허벌판 용봉골에 벽돌공장을 지어 학교시설 확충에 주력했다. 총장 재임기간에 금호각(도서관), 합동강의실(인문대 1호관), 대학본부(용봉관), 법대(석조박물관), 공과대학의 주요 건물과 학내 주요 도로 등을 건설하여 종합대학의 기본 틀을 완성했다. 골동품에도 안목이 깊은 대단한 수집가였던 최 총장은 1957년에는 자신이 소장한 귀중 서화와 도자기 60여 점의 유물들을 학교에 기증하여 박물관을 개관하는 데 힘을 보탰다.

최 총장은 열정이 넘쳤지만, 보수적인 성품을 지닌 것으로 짐작된다. 학생 제복 및 데모 단속을 지시하기도 했으며, 학생들이 교복의 윗 단추를 풀고 다니거나 모자를 착용하지 않으면 구두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학생들은 최 총장의 모습이 보이면 도망치기에 바빴다고 한다.

1959년에 최 총장은 2대 총장에 선출되었지만, 1960년 4·19 이후 학내에 민주화에 대한 열풍이 강하게 부는 바람에 총장직을 사임한다. 학교를 떠난 뒤 참의원 선거 출마해 정계에 진출했지만 1961년 5·16으로 의원직을 상실했으며, 이후 광주에서 생활하다가 1973년에 별세했다.

1978년 6월 9일, 전남대학교 동문회에서는 전남대학교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공헌한 최상채 초대 총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대강당 앞에 최 총장의 동상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거행했다. 동상 제작은 시대적 흐름 속에서 최 총장을 사임하게 만든 제자들이 사죄의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동상은 사범대 미술교육 김행신 교수가 조각했고, 글은 노산 이은상, 글씨는 장전 하남호의 작품이다. 김행신 교수는 최상채 총장의 사진만으로 입체적 표현이 어려워 최 총장의 아들인 의대 최원 교수를 모델로 제작했다고 전해진다. 2016년 대강당을 민주마루로 리모델링하면서 최상채 총장의 동상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대학 초창기, 용봉골에 터전을 잡아 전남대학교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공헌한 최상채 초대 총장은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용봉골 큰 스승으로 널리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전남대 50년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전남대학교 60년사』, <전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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