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두 번에 걸쳐 발표하고 토론을 했다. 한 번은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회가 주관한 “전라도의 역사에 대한 회고와 전망”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였고, 다른 하나는 광주시의회에서 준비한 “인문도시, 광주 만들기”였다. 필자가 발표와 토론을 준비하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는 인문학에서 ‘代’가 끊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전남과 전북을 통틀어 최근 10년 동안 한국사 중, 고려시대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사람은 단 1명뿐이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인문학 열풍’을 얘기하고 또 인문활동가들이 움직이고 있지만, 그곳에는 청년들이 없다.

인문학,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초학문으로서의 토대가 약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문학을 청년들이 찾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인문학’을 정의할 수 없지만, ‘인문학’의 역할에 대해 학생들에게 얘기해 왔다. ‘인문학’의 역할은 ‘이어줌’이라고 소개한다. 역사를 전공하고, 이를 가르치는 필자의 입장에서 나이를 먹고도 계속 이 ‘이어줌’을 바깥세상에서 실현하고 싶었다.

한편에서는 각종 힐링(?) 강의가 인문학 열풍에 편승하기도 했다. 유명한 힐링 강사의 말에 여성들의 신나는 웃음으로 가득하다. 이것이 인문학일까? 인문학 열풍이 이와 같은 휘발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모든 학문이 그러하겠지만, 인문학 역할 중의 하나도 ‘말하고, 듣고, 또 함께 말하고, 체험하고, 사유하고, 공유하고, 전달하는’ 일이다. 이 ‘이어짐’ 속에서 인문학은 생존한다. 완전히 딴 얘기를 해 보자. 요즘 학생들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성함을 물어보면, 정말 놀랍게도 많은 학생들이 모른다. 외가집으로 넘어가면 더욱 난감하다. 당연히 증조부모 성함은 거의 모른다. 기억이 끊어지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삶에서부터 인문학을 가볍게 생각해 버렸다. 옛날에는 삶 자체가 인문학이었다. 지금 우리는 가히 ‘기억의 재난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종으로 횡으로, 세대 간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 인문학에서도 ‘代’가 끊어져 있다. 그곳에 청년 세대가 없다.

역사적으로도 인문 지식을 통한 동력이 사회 발전을 견인해왔다.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의 성과가 인문적 경험이 없이 가능했을까? 지금의 정보화시대도 인문 지식이 없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 시대의 민주주의 발전은 인문학 발전과 동행해왔다. 필자는 인문학의 반대말을 모른다.

인문학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과 열정을 이끌어내야 한다. 청년 그 자체가 동력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선거 때가 되면, ‘청년’을 이야기 했지만 정작 그들은 ‘어른들(?)’을 위한 정책을 폈다. 어른들은 ‘청년’의 표를 바랐고, ‘청년’을 이용해 먹었다. 정부나 자치단체에서 청년 일자리 창출을 얘기하지만, 청년들이 토대할 인문학 공간은 없거나 비좁다. 있다고 해도 보여주기 식에 가깝고, 또한 이상하리만치 어른들을 위한 자리가 많다.

이제 우리는 정책적으로 청년들이 인문학을 매개하여, 자생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어 줘야 한다. 인문학에서 청년들이 살아갈 수 있는 토대 말이다. 인문학에서 ‘代’가 끊어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청년들을 통해, 종으로 횡으로 ‘이어진’ 사회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청년은 동력이다.

가끔 만 50살인 필자도 청년인 줄로 알고 헷갈린다. 착각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청년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시골의 노령화’는 막을 길이 없어진다. 우리 같은 나이 살을 위한 정책보다 젊은이들을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청년은 젊은이들을 말해왔다. 
 
▲ 서금석((재)한국학호남진흥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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