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과를 졸업했다. 사학과 문화 중에 ‘답사’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억에 남은 것은 역시 ‘답사’였다. 물론 역사 전공학과뿐만 아니라 ‘답사’를 필요로 하는 다른 인문사회계열 학과들도 ‘답사’를 한다. ‘답사’(踏査)의 한자 표현은 “어떤 곳에 실지로 가서 보고 자세히 조사하는 것”이란다. 조사[査]하는 것이야 '답사'의 소임이지만, 무엇보다도 ‘답사’의 묘미는 ‘답(踏)’에 있다. 밟아야 한다. 발품이 필요하다. 직접 보고 느끼고 또 알아간다. 어떤 때는 ‘답사’를 통해 사색하기도 하고, 힐링[치유]을 한다. 책상에 앉아 책으로 앎을 넓혀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답사’가 그렇다.

가르치다보면, 의외로 학생들이 ‘답사’를 꺼린다. 그 사이 많은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공무원 시험준비를 한다. 경쟁률이 100대 1이 넘는다고도 한다. 다른 지역은 이미 200대 1일 넘겼다. 우리 젊은 청춘들이 언제 끝날지 모를 이 깊고 높은 경쟁률 속에서 장래의 안정을 꿈꾼다. 마치 블랙홀과 같다.

사회 저변에 형성된 인문학에 대한 수요는 높아져 있다. 문화센터나 도서관의 인문학 강좌의 자리는 빈틈이 없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를 말한다. 이 상반된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젊은이들이 인문학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인문학에서 별 희망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학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붐은 자칫 왜곡될 수 있다. 결국 소수의 수혜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갖은 방법으로 청년 인문학을 홍보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문학에서 젊은이들은 없다. 정말 인문학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줄 수는 없을까?

간혹 눈치 빠른 친구들은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해서 국가 예산과 시의 예산을 딴다. 인문학을 주제로 한 사회적 기업들이 여기 저기 눈에 띄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문제는 지속성이다.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젊은이들의 열기를 느낄 수 없다는 데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최근에 광주시민들을 대상으로 오로지 취미 수준에서 “옛돌답사”라는 ‘답사’ 동호회를 만들었다. 대학 때 경험한 ‘답사’ 문화를 그대로 복기하고 있다. 주로 호남권을 위주로 매월 첫째 주 ‘답사’를 떠난다. 서너 명에서 출발했지만 불과 2년도 안되어 130명이 넘는 회원 수를 가지고 있다. 지금의 시대적 분위를 그대로 말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하고 관광을 하지만, 그들에게 ‘답사’ 문화는 생소하고 흥미롭다. ‘답사’는 오감을 자극하는 앎의 확장이다. 대중성이 높다. 프로그램에 따라서는 본인들의 삶을 치유하기도 한다.

‘답사’를 하면서 놀라운 사실은 광주 사람들조차도 광주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이다. 첨단에 살고 있는 분들이 의외로 ‘장고분’과 ‘무양서원’을 모르고 몇 십 년을 살았다. 광주사람들이 ‘면앙정’을 많이 찾았을 것 같지만 아예 모르는 분들이 많다. 물론 이들이 역사 유산을 모른다고 시민으로 사는 데 큰 불편함은 없다. 그러나 찾고 알아두면 이전과 이후는 앎의 결이 달라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자. 스토리텔링을 넘어 ‘히스토리 텔링’으로 프레지화한다면 ‘답사’는 진화한다. ‘답사’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 당연히 주역은 젊은 청춘들이어야 한다.
▲ 서금석(전남대 사학과 강사)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