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학가에는 학사제도 유연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수업일수, 평가 및 수업방식의 다양화와 유연화, 융·복합교육이나 실용성을 앞세운 교과목 신설, 자유학기제 등과 같은 교육과정의 유연화, 융·복합전공, 자기설계전공과 같은 학과조직의 재편을 비롯한 학사조직의 유연화가 추진되고 있다. 그런데 이는 구성원이 아닌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다. 평가나 재정지원을 앞세운 교육 권력의 요구를 대학들이 자발적으로 수용해가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학사조직과 그 운영은 교수-학습의 주체들에게 맡겨져야 한다. 헌법은 교육의 자율성과 전문성, 그리고 대학에 대해서는 특별히 자율성을 보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대학의 역사는 관치와 통제로 점철되어 왔으며, 그동안 대학들은 규제에 길들여지고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해 왔다. 국가의 정책이나 지침에 순응하면 존립에 문제가 없었기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학사제도 유연화의 추동력이 무엇이었든,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기존의 시스템이나 운영방식에 변화를 꾀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어떻게 수용하는 것이 혼란과 갈등을 최소화하고 대학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은 무엇일까?

첫째, 대학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과 그에 부합하는 방식으로의 개혁이 필요하다. 물론 대학이 스스로를 혁신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대학을 외부적인 힘으로 개혁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대학의 무능은 관치의 결과로 학습된 것이다. 따라서 학습된 무능력에서 벗어나 대학이 자율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학은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자율적인 학문공동체이고, 이의 핵심은 학사제도이다. 따라서 학사제도의 개혁은 자율적인 학문공동체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결정되어져야 한다. 이를 위한 대학의 제도적 기반구축과 구성원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둘째, 학사제도의 유연화가 개인적인 편의나 변칙적인 교육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헌법이 보장한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학사제도의 유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학사제도 유연화는 대학교육의 책무성을 높이기 위해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출석이나 학점을 쉽게 따는 방편이어서는 안되며, 교수들이 교육에 대한 책무성을 소홀히 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더 이상 대학이 ‘상아탑’이라는 이미지를 고수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대학교육의 본질을 훼손하여 대학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해서는 안된다.

셋째, 제도의 도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현가능성을 높이는 일이 필요하다. 수년전부터 대학들이 다전공제나 연계전공의 활성화를 외쳐왔다. 그런데 현실은 참담하다. 2018년 8월 우리 대학 졸업생 1,250여명 중에 복수전공 이수자는 90여명이며, 연계전공 이수자는 2명에 불과하다. 제도가 없는 것이 아니라 활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실험대학제도, 학부제 등의 좌초가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연화를 외치는 중에도 전공중심주의는 심화되고 있으며, 전공학점 비중의 강화, 폐쇄적 수강제도, 다전공 이수학생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등은 여전하고, 학과간 칸막이는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다. 제도의 활성화를 가로막는 요인들을 제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비록 학사제도의 유연화가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추동된 것이지만, 그로 인해 대학이 규제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교육의 전문성과 자주성에 기반을 둔 자율적인 학사운영의 기회를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기회를 활용하는 것은 구성원의 몫이다. 학사제도의 유연화가 대학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진정한 자율적 학문공동체의 모습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