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0년 5월 18일 광주를 바라보는 시선은 제각각이다. 전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고 폭력 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군부가 광주를 외부로부터 차단하고 폭동이라 선전했기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잘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 <전대신문>이 타지학생과 광주학생간의 가상 대화를 만들어봤다.
 

타지학생: 모 아프리카 TV 비제이가 5·18을 폭동이라고 하던데 정말이야?

광주학생: 무장투쟁은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로부터 광주 시민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최후 수단이었어.
5월 19일 계엄군이 최초 발포한 총알에 조대부고 학생이 부상을 당했고 다음날에는 집단발포로 비무장 시민 2명이 숨졌어.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21일 도청 앞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어. 공수부대는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고 시민 수십 명이 숨지거나 크게 다쳤어. 결국 집단 발포가 시작된 지 30분 뒤 시민들은 무기고를 탈취했고 시위는 무장투쟁으로 이어졌지.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 차단된 광주 시민들은 공동체 정신을 발휘했어. 혈액이 부족할까봐 헌혈하려는 시민들이 줄을 섰고 부족한 식량에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먹었다고 해. 폭동이 일어났다고 보기 힘든 정황이지.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규정한 건 신군부가 그들이 자행한 폭력진압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지어낸 말이야.

타지학생: 봉지에 추모공간도 마련돼 있고 홍보대사도 모집 하던데 왜 중요하게 다루는 거야?

광주학생: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지. 광주민주화운동은 국가 폭력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정치적 비극이야. 정치권력을 잡으려는 신군부의 욕심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희생당했어. 한국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정도였어.
아직까지 가해자 처벌과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이유야. 최초 발포 명령자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아. 또 시민을 향해 총기를 사용한 것, 고문을 자행한 것에 대해 관련자들은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해.
아직도 행방불명인 사람이 존재하고 그날의 끔찍한 기억에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이 많아. 끝나지 않은 역사이기에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하고 관심을 가져야해.
 
타지학생: 더 공부해보고 싶은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광주학생: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가 많아. 5·18 당시 광주를 방문한 서울 택시운전사와 독일인 기자의 이야기 <택시운전사>, 영원히 치유되지 못한 5·18의 상처를 담은 <26년>, 계엄군에 대항한 시위대의 열흘간의 분투를 다룬 <화려한 휴가> 등이 있어.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