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대 1호관 전경(1950~1960년대)
 2003년 봄부터 ‘인문대 1호관’ 건물 철거에 대한 학내의 논쟁은 뜨거웠다.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대학본부와 구성원간의 활발한 토론의 결과 철거하지 않고 보존을 택하게 되었지만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뜻깊은 결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문화재청으로부터 전남대학교 최초 건물이라는 역사성을 인정받아 2004년 9월 4일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96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사회대 앞 정원에는 중앙도서관 용도로 ‘금호각’을 지었다. 아마도 풍수지리상으로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다는 ‘용주마을’의 뒤쪽 구릉에 위치해서 용의 머리이니 여기에서 공부하면 학생들의 두뇌활동이 활발해질 것이라는 풍수지리설적인 믿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대학이 어려웠던 초창기에 금호그룹(당시 광주여객) 박인천의 지원(50%)으로 1955년 3월에 착공하여 1955년 11월 3일에 준공하였다. 벽돌조 2층 슬라브 건물로 건평은 331평이다. 우리 대학교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이었다. 금호각은 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1973년 중앙도서관이 준공되면서 대학원 건물로 사용되다가 1981년 6월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인문사회과학관(현 사회대)이 들어섰다.

‘용봉관’(옛 대학본부)은 1956년 4월 21일 착공하여 1957년 12월 2일에 준공되었다. 의과대학에 있던 대학본부를 1957년 12월 20일에 이곳으로 이전했다. 1996년 5월까지 대학본부로 사용되었다. 1960년대에 측후면 2~3층 부분의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연면적 2,541㎡ 규모로 3층 적벽돌 조적식이다. 최상채 초대 총장의 주도로 일본 교토대학 본관 건물을 본 떠 설계하였다고 한다. 용봉캠퍼스 중앙 축인 정문으로부터 용봉탑·봉지·백도와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남향이다.

인문대 1호관과 용봉관은 한국전쟁 직후 물자가 태부족한 상태에서 지은 까닭에 철근 대신 ‘뽕뽕다리’라고 부르는 비계용 철판(유공강판)을 절단해 층간 골조에 넣었는가 하면 시멘트가 부족하여 콘크리트 강도도 기준에 훨씬 못 미쳤다. 건물 외벽에 사용된 붉은 벽돌도 공대 4호관 부근에 벽돌 공장을 건립해서 학생들이 벽돌을 손으로 일일이 운반했다고 한다.

1950년대에 연이어 지어진 4개의 건축물은 당시로서는 학생들이나 지역민들에게 호기심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의과대학 구 본관은 기역자 건물로, 금호각은 하얀색의 지붕 없는 슬라브 건물로, 인문대 1호관은 구릉위의 웅장한 3층 건물로, 그리고 구 대학본부는 교정 중앙에 세워진 대학행정 중심부 건물로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 황호균(역사연구회 대표필진/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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