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용봉캠퍼스는 명당이라고 소문났다. 사회과학대학과 인문대학을 거쳐 학생회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나지막한 언덕은 용주(龍珠)와 반룡(盤龍) 마을을 휘감고 있어 반룡희주(盤龍戱珠)형 명당이라 전해왔다. 특히 사회대와 인문대 건물 자리가 그냥 보통 명당자리가 아닌 세 명의 재상과 천 명의 문인, 만 명의 무인을 배출하는 천하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용봉동이라는 지명을 활용해서 ‘용비’와 ‘봉비’라는 캐릭터와 봉지, 용봉탑의 정상에 봉황을 만드는 등 ‘용’과 ‘봉황’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 왔다. 하지만 용봉동의 지명 유래를 생각해 보면 ‘봉황’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 이유는 ‘용주마을’과 ‘반룡마을’에서 ‘용(龍)’자를, ‘봉곡(鳳谷)’에서 ‘봉(鳳)’자를 가져와서 ‘용봉동’이란 동명(洞名)을 조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용주마을과 반룡마을은 대학 경내와 인문대 뒤편에 자리해서 지형적으로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만 봉곡마을은 어린이대공원 전망대 기슭에 있는 마을이어서 지형적으로도 관련이 없다. 봉곡마을은 용봉동의 서쪽 경계인 어린이대공원 전망대(75m) 기슭에 자리하며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형세이다.

우리 대학은 1952년 6월 9일에 개교한 후 학교 부지로 화순 너릿재 부근과 광주사범학교(광주교육대학교)부근, 그리고 용봉캠퍼스가 후보지로 떠올랐는데 장기적인 안목과 ‘풍수지리’를 고려해서 지금의 장소에 터전을 마련했다. 1962년 5월 19일 자 전남대 신문기사가 눈길을 끈다. “용봉동이 자리 잡은 이곳은 삼각산의 지맥이 흘러내려와 여기에서 임금왕자를 써 놓았는데 그 형세가 용의 피로 쓴 임금왕자 같고, 그 앞에 태봉산(광주역 부근에 있었던 산)을 비롯한 세 개의 구슬이 구르고 있어 마치 용반희주(龍盤戱珠)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봉동은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형국의 길지라고 일컬어 왔다.”
‘용지’ 굴착을 종용한 도인에 관한 일화도 용의 승천을 돕기 위한 연못 조성이 단순히 관상용이나 조경차원으로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둔 해석으로 여겨진다.

학교 부지로 용봉캠퍼스를 선정하거나 인문대학 1호관을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된 이유로는 ‘풍수지리’적인 조건과 함께 식수 문제를 상당히 고려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상채 총장은 학교 부지로 용봉캠퍼스를 선택한 것은 지하수가 없는 광주사범학교(광주교육대학교) 부근 보다는 용봉캠퍼스에는 이미 농과대학이 있고 현재의 인문대학 3호관과 도서관 본관(홍도) 사이의 계곡에 학생들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지하수 관정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80년대 후반 당시 박물관 동산에 홍도 건설을 추진할 당시 박물관장(김희수 교수)에게 흰옷 입은 도인(풍수 지관)이 박물관 동산을 훼손하면 큰 재앙을 입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이곳이 용의 심장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라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그 이후에 도서관과 전남대 직원들의 흉사나 건강 악화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학생들의 등교 길도 예전에는 지금과 달랐다고 한다. 초창기인 1950년대 후반부터 1981년경까지는 주로 사대 부중에서 법대로 올라가는 인도를 통해 법대와 금호각(도서관), 상대, 문리대로 이어지는 길을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1981년경 정문에서 법대로 올라가는 차도를 개설하고 시멘트 포장을 할 당시에 용의 목을 누른다는 학내 반대 의견이 들끓었다. 사회대 용두 축제는 용주마을 뒤에 위치해서 용머리로 생각하여 붙인 축제명이다. 공과대학은 용의 발톱에 해당한다고 한다.

용이 여의주를 문 형국인 용주마을과 용틀임을 한 반룡마을의 지형을 활용한 반룡희주(盤龍戱珠)형 이미지를 캐릭터에 적극 활용하는 것도 고려해 볼 일이다. 학교 부지를 선정할 때도 허투루 하지 않고 ‘풍수지리설’을 적극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상수도가 없던 시절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하수관정을 찾은 후에라야 결정했다 하니 60여 년 전의 일이라 해도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황호균 (역사연구회 대표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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