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지’는 단순히 관상용이나 조경차원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1969년 어느 날 총장실에 들른 백발 도인은 유기춘 총장에게 “연못이 있어야 용이 승천하는데 뭐하느냐!” 호통을 쳤다고 한다. “용이 승천해야 대학에 큰 인물이 날 텐데” 혀를 끌끌 차면서…

다행히 영문학과 동문인 송호림 장군이 ‘CAC’(전투병과 교육사령부, 흔히 ‘상무대’라는 군사교육기지) 사령관으로 있어서 중장비를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69년 여름부터 연못을 파기 시작하여 1971년에 완공하였다.

유총장이 임기도 끝나기 전인 1974년에 문교부장관으로 발탁되자 ‘개천에서 용났네’라는 말이 학내에 떠돌았다. 또 당시의 정서로 생활과학대학생들이 시집을 잘 가는 이유 중의 하나도 용지와 붙어 있어 좋은 기운(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더구나 1980년대 이후 우리 대학 출신들이 고시합격자가 다수 배출된 것이나 한국 현대 정치사에 민주화 운동의 주역으로 활발히 활동을 한 것도 용지를 팠기 때문 아니냐고 수군거린다.

용지를 언급한 가장 오랜 자료는 전남대학보 1969년 9월 11일자 기사이다. “빠른 공사를 위해 CAC로부터 덤프트럭 4대, 크레인 1대, 불도저 1대의 지원을 얻어 용지 완성의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중장비를 지원해 준 송호림 장군에 대해서 대학신문은 CAC사령관이라고 여러 차례 기록하지만 지춘상 교수는 향토 31사단장(으로 기억한다.

용지 착공이나 섬 1개와 2개의 완성 시기에 대해 대학 신문기사와 졸업앨범 사진에는 약간의 차이점이 보인다. 우선 용지 착공시기가 대학신문에서는 1969년 여름이라고 하나 1970년에 촬영된 문리과대학 졸업앨범 사진에는 용지의 굴착 흔적이 없다. 1971년에 촬영된 대학 학보사 발간 캘린더 사진에서 비로소 섬 1개의 용지에 물이 담겨진 모습이 보여 적어도 용지 섬 1개의 완성 시기는 1971년 가을쯤이다. 용지 섬 2개의 완성시기도 용지를 새롭게 단장하는 1976년경이다.

그동안 용지 조성에 대해서 알려지기를 용봉대(龍鳳臺)라 부르는 용봉캠퍼스에 용이 놀 수 있는 연못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한다.(지춘상 교수) 하지만 <용지 도인설>은 필자가 80년대에 원로교수에게 들은 이야기이여서 대학역사 구술사자료 보존 차원에서 여기에 소개해 둔다.

재작년에 추진한 용지의 퇴적물 제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쉽다. 아무쪼록 수련을 제거한 빈 공간에 백련, 홍련, 가시연 같은 다양한 연꽃의 생육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한다. 용지는 우리 대학 구성원 뿐 만 아니라 북구 주민들의 휴식처로 많은 사랑을 받는 귀중한 수변공간이다. 용지주변으로 화초공원도 만들고 휴게시설을 보강하여 쾌적한 분위기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황호균(전남대 역사연구회 회장,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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