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로! 5.18 민주화운동의 그 현장. 듣기만 해도 가슴 시리고 생동감 넘친다. 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점령당하던 때에도 금남로는 묵묵히 시대의 아픔을 함께 했다. 이후 그곳은 80년대 내내 광주 민주화 투쟁의 장소가 되었다. 흔히 운동권에서 부르는 노래 중에 ‘금남로’는 ‘무등산’과 함께 빠지지 않은 가사가 되었다. 금남로는 매년 5.18을 기념하는 행사장으로 상징화되었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때도 금남로는 우리를 불렀다. 바로 그곳에서 작년과 올 3월 11일까지 광주시민들은 매주 토요일 빠지지 않고 박근혜 탁핵을 외쳤고,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박근혜의 파면이 이루어지자 다음날 5만의 광주시민들은 ‘촛불 승리’를 자축했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37년 만에 시대의 기쁨을 함께 누렸던 곳! 3월 10일을 ‘촛불혁명의 날’로 제정하여 금남로에서 매년 이날 촛불을 들기로 했다니 이제 금남로는 매년 승리를 재현하는 자리가 됐다.

  충장로가 임진왜란 때 이 지역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시호를 따서 그분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도로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금남로의 유래에 대해서는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인조가 집권한 뒤 그 이듬해에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 정충신(1576~1636)은 이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이때의 공으로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어 금남군(錦南君)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바로 금남로(錦南路)는 정충신의 군호를 따서 그분을 기념하기 위한 도로이며, 충장로에서 유동삼거리까지입니다. 8·15광복 이후 일본식 지명을 없애면서 금남로 1~5가가 되었다. 1957년 동구 충금동회 관할에서, 1986년 광주직할시 동구 금남로 1~5가, 그리고 1995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1~5가가 되었다. 참고로 광주 첨단 무양서원에 모셔진, 표해록의 저자 최부의 호도 금남(錦南)이다. 동호이인(同號異人)인 셈이다.

  정충신의 본관은 錦城으로 지금의 나주다. 그는 고려 말 무신 정지 장군의 9대 손이다. 정충신은 광주에서 살았다. 정충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의 어린 나이로 광주목사 권율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였고, 나중에 이항복 밑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무관으로 성장했으며, 27세 되던 때에는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를 계기로 그는 북방에서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는 여진족의 정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1617년에는 그는 임진왜란 때 끌려간 포로를 데려오기 위해 오윤겸의 수행군관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정충신은 부원수가 되었지만, 그는 이미 동북아시아 세력을 재편해버릴 정도로 커져버린 청나라와의 전쟁은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화의를 주장했다. 이 때문에 정충신은 당진으로 유배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조선은 1636년 병자년 3월에 청나라를 배척하는 주전론이 득세하여 청나라에 단교를 선언했다. 이해 5월에 정충신은 사망했지만 그가 살아서 우려했던 대로 같은 해 12월 차디찬 겨울, 청나라는 조선을 침범했다.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2개월 정도를 버티다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나주 노안면 금안리에 경렬사가 있다. 정지 장군의 시호가 경렬(景烈)이다. 이 경렬사에는 정지 장군 및 정충신 장군을 비롯해 6명이 함께 모셔져 있다. 정지 장군은 14세기 여말선초 시기 무장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이 당시 고려는 왜구의 침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정지 장군의 활약은 우왕 9년, 남해 관음포 해전에서 대첩으로 이끎으로서 해전사에 길이 남은 인물이다. 고려말 왜구 격퇴에 있어서 관음표대첩은 홍산·황산·진포대첩과 함께 4대 대첩 중의 하나로 불린다. 당시 정지 장군이 입었던 갑옷은 지금까지 전한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또 광주 망월동에도 정지 장군을 모시는 경렬사가 있으며, 이곳에 장군의 묘소가 있다. 광주 농성동 돌고개부터 광주역까지 도로명이 바로 경렬로이다.
▲ 서금석(전남대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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