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우연치 않은 기회로 청각장애를 갖고 계신 작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들리지 않는 다는 아픔을 딛고 그림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작가 인터뷰 기사를 작성하던 중, 우리는 ‘말이 어눌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장애에 대한 표현이 적당치 않은 것 같아 조언을 구하던 중, 작가에게 예상치 못한 답변을 받았다. “어눌하다는 표현을 완벽하지 않다고 바꿔주실 수 있나요? 제 나름대로 노력해서 이만큼 할 수 있게 된 거거든요. 왠지 그 말이 저 자신에게 아프게 다가오네요.”

비판조의 기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에게는 아픔을 줄 수 있다니. 오히려 그 원고를 수정했던 많은 기자들도 그 말이 작가님께 아프게 다가올지 예상하지 못했다. 그 생각 끝에 필자 역시 누군가의 이야기를 보기 좋게 포장한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말이라는 것이 그렇다. 다시 주워 담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이번 서울대 총학생회장 사퇴 역시 마찬가지이다. 본인은 아무런 의미 없이 던진 말일지라도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 누군가는 상처받았다. 상처들은 부메랑이 되어 본인에게 ‘사퇴’라는 벌로 돌아오게 됐다.

기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좋은 기사일지라도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한다면 그것은 기사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한 번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한 번 독자에게 건네진 신문의 기사를 다시 무를 수 없다. 그래서 오늘도 기자들은 두 눈을 감지 못하고 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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