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다. 길거리엔 총천연색 학생들이 하늘거린다. 모양도 다양하다. 털 뭉치, 헝겊, 비닐, 가죽, 나일론 등등. 스무살 병아리 신입생부터 복학한 학생들 모두, 자신의 털가죽이 아닌 누군가에게서 빌려온 재료로 저마다의 개성을 뽐낸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옷으로 표현된다.
 
털과 헝겊. 이 두 단어를 통해 보면 인간은 참 볼품없는 존재이다. 화려한 깃도, 멋진 뿔도, 날렵한 발톱도 없이 맨몸뚱아리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게 부끄러웠을까.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맨 처음 한 일은 나뭇잎을 떼어 몸을 가린 것이었다. 그들의 부끄러움은 다른 동물에 비해 초라한 인간의 살색 몸뚱아리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남의 털을 빌려 우리 몸을 덮는다. 우리 조상들은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옷’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사냥한 동물의 털가죽을 엮어, 농사를 시작한 이후에는 식물에서도 질긴 섬유를 뽑아 ‘천’을 제작해 옷을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며 가죽과 천 뿐만이 아닌 털뭉치와 돌덩어리, 쇳덩어리를 이용해 더욱 강한 옷을 만들어냈다. 날도래 유충이 돌을 붙여 자신을 덮고 소라게가 소라고둥에 거처를 마련하듯, 우리는 남의 털가죽을 빌려 우리의 맨몸을 가렸다.
 
그런데 무언가 부족했다. 인간에게도 화려함에 대한 본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벌거벗은 몸뚱아리는 아쉽게도 예쁜 색을 가질 수도, 멋진 모양을 만들어낼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생명의 장식품을 빼앗아 온 몸을 덮었다. 화려한 무늬, 휘황찬란한 깃털, 부드러운 털가죽, 그리고 반짝이는 돌, 쇠붙이 등등. 우리는 체온을 유지하고 몸을 보호하는 것 이상으로 화려함이라는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옷을 입었다. 야생의 아름다움을 빼앗는 방식으로 말이다. 본능적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 소유욕으로 변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몸에 걸치는 모습으로 우리의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았을까.
 
3월, 파란 하늘 아래 총천연색 학생들이 학교를 지난다. 시계탑 옆 카페 2층에 가만히 앉아 그들을 바라보면 야생이 떠오른다. 드넓은 대초원과 빽빽한 숲, 끝이 없는 바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 생물들의 화려함이 우리에게 한발짝 다가온 느낌이다. 초라한 살색 맨몸의 부끄러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 우리는 오늘도 헝겊을 덮으며 야생의 화려함을 꿈꾸고 있다.
▲ 이주현(생명과학·생명기술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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