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왔는데, 봄이 아니다. 3월 환한 햇볕이 민망하리만큼 마음이 풀리지 않는 것은, 꽃샘추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온 국민의 마음을 난도질한 ‘국정농단 사태’는 우리들의 계절감각마저 마비시키고 있다. 마비된 게 어디 계절감각뿐이랴. 최순실의 태블릿PC 사건, 촛불시위 시작, 대통령 탄핵 소추, 특검, 헌재의 재판까지 달려오는 동안, 국정은 물론 곤두박질치고 있는 나라 경제에 이젠 국민들의 일상조차 너덜거리고 있다. 시간은 가고 계절은 바뀌었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2016년 겨울에 멈춰버렸다. 

아마도 올해 신입생으로 입학하는 학생들 중 일부는 1월 1일을 알리는 시간에 특별한 경험을 했을 터이다. 12월 31일, 미성년 출입 금지인 시내 카페나 주점 앞에서 5분 대기조처럼 기다렸다가 새해가 되는 순간, 당당하게 문을 열어 제치면서 소위 ‘민증’을 보란 듯이 내비치며 들어가는 것 말이다. 나름 유쾌하고 통쾌한 방식으로 이젠 어른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입사식 같은 이런 풍경을, 매해 첫날이면 시내 거리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진짜 어른이 되었을까? 

국정농단 사태로 들썩이는 과정은 한국사회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주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 질문 중 하나는 아마도 ‘좋은 어른이란 무엇일까’로 표현되어도 무방할 듯하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책임을 회피하는 대통령, 헌재 재판관에 대해 막말을 서슴지 않는 대통령 변호인단, ‘보수’라는 이름도 쓰기 아까운 극우단체들의 집회에 일당 받고 출연한다는 노인들. 이들의 공통점 하나는 주민등록상 ‘어른’들이라는 점이다. 둘째 공통점은 이들이 ‘좋은 어른’들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필자의 20대는 한국사회가 들썩거렸던 80년대를 온전히 관통하는 시간이었다. 그때 가슴 깊이 박혀 있던 질문은, ‘왜 하필 반면교사를 통해 세상을 배워야 하는가, 왜 이따위 시대에 청청한 20대를 보내야 하는가’였다. 이 질문은 광주시민의 희생을 훈장처럼 달고 출범한 군사정권, 그 정권에 부역한 4·19세대, 청년들의 옥상 투신과 분신이 연일 이어져도 역시 눈과 귀를 막은 채 숨을 죽였던 소시민 장년 어른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 이 질문은 고스란히 나 자신에게 칼이 되어 돌아와 버렸다. 우리는 왜 이따위 세상을, 이 못된 유산을 젊은 세대에 남겨주었는가. 왜 우리는 나쁜 어른, 반면교사가 되어 버렸을까. 처절한 반성으로 촛불을 든다 한들, 그동안 방기했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공의 적으로 전락한 대통령, 태극기의 다양한 사용처를 발명한 변호인단과 극우 시위대들은 그 누구의 모습도 아닌, 바로 우리 세대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지금, 비로소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무 살을 맞은 여러분은 부디 제대로 된 성년을 맞이하게 될 대한민국의 ‘좋은 어른’이 되기를 당부한다. 어쩌면 격동의 근대 100년이 안고 있는 근원적 폐해가 일부라도 청산될지 모르는 이 시기에, 이 당부는 여러분에게 주어진 소명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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