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는 김정호의 호이다. 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라는 이름으로 차승원 주연의 최근 영화도 상영되었다. 중·고등학교 모든 교과서는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실고 있다. 북한의 교과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김정호를 많이 아는 줄 알았다. 

그러나 김정호를 좀 더 알고 싶어 한 발짝 들어가 보면 의외의 상황에 난처해져 버린다. 김정호가 언제 태어났고 또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생애는 19세기 초반에서 중반 이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시기 정도로 헤아려질 뿐이다. 이 시기는 대체로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렸던 안동 김씨 60년 정권과도 겹쳐진다. 더 나아가 그가 어떤 신분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영화에서 김정호 역의 차승원이 허름한 옷차림에 갓을 쓰고 나왔기 때문에, 자칫 몰락한 양반이거나 중인 신분쯤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여느 김씨 족보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김정호는 중인보다 낮은 층의 양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영화에서 갓을 쓰고 등장한 장면은 사료 분석이 그만큼 덜 되었다는 얘기이다. 영화에서 흥선대원군과 안동김씨와의 대결 속에서 대동여지도가 그려진 것도 다만 허구일 뿐이다.

한국의 지도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소소할 뿐이다. 또 그가 죽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불과 150여 년 전으로 그리 멀지 않는 시기였다는 점에서도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는 것은 그가 남긴 여러 작품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김정호에 대한 사료 부재를 그의 신분이 낮았던 이유만으로 설명되기에는 어딘지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김정호는 지도만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지를 먼저 만들었다. 지도는 지지의 부록이며, 지지는 지도의 설명서이다. 따라서 이 방대한 지지와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김정호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에게도 경제적인 후원자가 있어야 했다. 최한기·최성환·신헌 등 당시 관료층이 그의 인적 인맥이었다.
  흔히 김정호를 생각하면, 대동여지도만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김정호는 『동여지지』와 『여도비지』 그리고 『대동지지』 등 세 개의 지지를 편찬했고, 여기에 짝을 맞춰 『청구도』와 『동여도』 그리고 『대동여지도』 등 세 종류의 지도를 만들었다. 『대동여지도』는 『대동지지』의 부록 지도 곧 부도였던 셈이다. 『대동지지』는 방대한 책으로 엮어져 있다. 여기에는 전국의 산천·도로·강역·국방·요새·역사 지리 등의 내용이 빼곡히 적혀져 있다.

김정호는 왜 이렇게 지도와 지리지를 만드는데 평생을 바쳤을까? 그것은 그가 만든 지지와 지도의 특징을 확인함으로 알 수 있다. 첫째는 그것들의 정밀함에 있고, 둘째는 그것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지리는 국가 통치자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요긴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달리 그가 만들었던 지지와 지도가 일반화되지 못하고, 결국 19세기 후반의 시대적 물결 속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영화의 대사가 그나마 김정호의 열정을 전하고 있다. 함께 일하는 조수가 묻는다. “근데 아저씨는 왜 그리 지도를 그리려 했소? 김정호가 대답한다. “가슴이 뛰어서” “길 위는 신분도 귀천도 없다. 다만 길을 가는 자만 있을 뿐, 길 위에 있을 때 나는 늘 자유로웠고, 그 길을 지도 위에 옮겨놓을 꿈에 평생 가슴이 뛰었다. 어쩌면 채우지 못할 꿈으로 그칠지라도 살아 숨 쉬는 한 나는 꿈꾸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양반이 아닌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마지막 행적에 대한 기록조차 없이 세상에서 홀연히 사라진 것으로 되어 있다. 역시 한때 종적을 알 수 없었던 대동여지도 목판은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11장의 원판이 발견되면서 오늘날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천만 다행이다.
▲ 서금석(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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