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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상징이었던 총학생회우리 대학 총학생회의 역사
글= 도선인 기자/자료정리= 지용준 객원기자  |  sunin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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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28  16:4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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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대학 2대 총학생회장~48대 총학생회장의 모습. 1대 총학생회장은 사진자료가 없어 게재하지 못함을 양해바랍니다.
60년, 혼동의 시기
50년 전으로 총학생회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총학생회는 1952년 초대 총장인 최상채 총장의 취임과 함께 학도호국단이 결성되면서 시작됐다. 학도호국단은 대통령령에 따라 발족한 학생자치단체로서, 대학생들의 애국심 함양과 국가 헌신을 목적으로 하며 각 대학에 설립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하지만 1960년 4·19혁명이 민주화의 발판이 되면서, 새로운 학생자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전국의 학도호국단이 해체됐다. 이후 우리 대학에서 1961년 사실상 1대 학생회인 ‘재건학생회’가 발족됐다. 이는 5·16 군사정변 이 후, 군사정권이 주도한 재건국민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후 학생회는 1974년 14대로 기록된 김형균 총학생회장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1975년에 문교부에서 전국 98개 대학에 다시 학도 호국단을 창설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학도호국단은 학생을 대표하는 실무를 담당했고 공산주의를 멸하자는 자체검열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80년, 민주화의 중심
   
▲ 연대별 투표율(평균)

1980년 4월, 5년 만에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박정희 시해 이후, 우리 대학에도 민주화의 봄이 찾아 왔다. 학원자율화를 외치며 학도 호국단이 해체되고 학생회가 조직되어 박관현 열사가 총학생회장에 선출됐다. 그러나 5·18 민주화 운동 당시, 학생회와 단과대 회장단 대부분이 연행되면서 지도부가 또 다시 와해됐다. 1982년 박관현 열사까지 사망하자, 학내에서는 독재정권에 반발하며 연일 시위가 이어졌다. 1984년 총학생회 보궐 선거가 치러졌으며 학내에서는 총학생회 부활 서명운동이 진행되기도 했다. 90년대까지 총학생회 선거 투표율은 60%대를 유지했다.

2000년, 저조한 관심으로 위기
   
▲ 연도별 선거 첫째 날 투표율 비교

2000년 총학생회는 대학등록금 인하 및 학과폐지 반대에 중점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달라진 사회분위기에 총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은 낮아졌고 1999년 이래 계속 연장투표로 총학생회 선거가 진행됐다. 올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내린 ‘너에게’선본의 후보자 자격박탈 징계가 논란이 됐고, 후보 자격을 박탈당한 김설 씨(정치외교·12)는 선거 보이콧 주장을 펼쳤다. 결국 2017년 총학생회 선거는 5년 만에 치러지는 경선임에도 역대 최저 투표율을 보였으며 총 학생회가 꾸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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