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게 돼도 나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

커다란 귀, 귀여운 얼굴 그리고 각양각색의 표정들. 카카오톡 채팅창에 앙증맞은 토끼 이모티콘이 날아온다. 바로 구경선 작가가 그린 캐릭터 ‘베니’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청춘’의 거리 ‘대학로(혜화)’로 향했다. 내가 만난 그는 꾸밈없고 해맑은 ‘베니’, 그 자체였다. 장애로 인해 완벽하진 않은 발음이었지만, 그가 전하는 목소리만큼은 또렷했다. 초롱초롱 빛나는 그의 눈빛은 그 어떤 말솜씨보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넌 나고 난 너야, 또 다른 나 ‘베니’

“중학교 때, 친구가 <언플러그드 보이> 만화책을 추천해줬는데 남자주인공이 너무 잘생긴 거예요!” 구 작가가 만화에 관심을 가지게 계기는 거창하지 않았다.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를 통해 여러 만화를 접하게 되어 만화가를 꿈꿨다. 그는 “어렸을 때는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해 보이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며 웃었다. 화가든 만화가든 그가 그림을 통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같다.

“청각 장애를 가진 저를 대신해 ‘베니’가 사람들의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베니’는 우리 곁으로 왔다. 구 작가는 ‘베니’를 통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을 표현한다. “‘베니’도 속상하면 울고, 기쁘면 웃거든요. 이런 건 특별한 게 아니잖아요.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기에 많은 분들이 공감해주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구 작가에게 ‘베니’는 어떤 존재일까. 그는 ‘베니’가 ‘미키마우스’처럼 오래 사랑받을 수 있는 캐릭터로 남길 바란다. “지금도 ‘베니’와 관련한 작업이 많이 들어오지만 마구잡이로 하고 싶지 않아요. ‘베니’의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차근차근 해나가고 싶어요.” 그에게 ‘베니’는 단순한 ‘캐릭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또 다른 나’다.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닌 ‘장애’

구 작가는 두 살 때 열병을 앓고 귀가 아예 들리지 않게 됐다. 하지만 그는 “장애가 불행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가끔은 축복이 될 때도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세상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많지만 다 알려지진 않아요. 똑같은 노력을 해도 평범한 사람들보다 장애인들을 더 대단하게 보는 시선은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남들보다 열악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신의 그림이 사랑받는 이유를 그저 ‘운이 좋았다’며 수줍게 웃었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장애’에 대한 인식 개선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해고 되거나 차별을 받는다는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구 작가는 자신이 먼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그래야 다른 장애인들에게도 더 많은 기회가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장은 많이 힘들겠지만 조금만 버티다보면 ‘장애’가 당신에게 축복으로 다가올 때가 있을 거예요.” 그는 누구보다 그들의 아픔을 잘 안다.

꿈꿀 수 있어 ‘괜찮은 하루’

망막색소변성증. 하늘은 구 작가에게 너무나도 무심했다. 청각장애를 가진 그에게 이젠 눈마저도 가져가려 한다. 하루하루가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볼 수 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눈이 보일 때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 걸 모두 해보자.’ 이렇게 시작된 그의 꿈 프로젝트. 작년 2월 출판된 그의 자전적 에세이, <그래도 괜찮은 하루>를 읽다보면 작업실 갖기, 소개팅 해보기 등 다양한 버킷리스트를 엿볼 수 있다.

그 중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장면이 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수많은 인파들 속에서 우두커니 명화를 보고 있는 ‘베니’. 이 그림은 구 작가가 인터넷을 보며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상상 속 그림이었던 오르세 미술관은 지난 해 여름, 파리에 다녀오며 현실이 됐다. 그는 “내가 그린 장면이 현실에서 펼쳐지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며 행복했던 그 때의 추억을 회상했다.

그렇다면 구 작가가 가장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는 뭘까? 그는 망설임 없이 ‘엄마 집 사주기’를 꼽았다. “엄마는 저에게 큰 나무 같은 사람이에요.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는 나무.” 그는 엄마가 자신을 힘들게 키웠다는 걸 알기에 엄마의 경제적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다. “엄마가 아직까지 일을 하시는데, 이제 고생은 그만하고 하고 싶은 거 하시면서 여유롭게 사셨으면 해요.”

“나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이 꿈꿀 수 있었으면”

과거 ‘싸이월드 스킨작가’로 활동했던 구 작가지만 ‘싸이월드’의 하락과 함께 긴 공백이 찾아왔다. 우울함과 좌절감으로 가득 찬 나날을 보내다 문득 깨달은 생각. ‘내가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 해서 너무 힘들었구나.’ 그래서 그는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 위해 만든 미술 선교 프로그램 <내가 되고 싶은 나>를 계획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은 그림을 통해 누군가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직접 세계 각지의 아이들을 찾아가 같이 그림을 그리며 꿈을 나누고자 했죠.” 꿈꾸는 것조차 힘겨운 아이들에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의 꿈을 그림을 통해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했다.

현재까지 4개국을 다닌 상태며, 앞으로 30개국을 채우는 것이 목표라는 구 작가. “저는 이 활동이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봉사’는 ‘내가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잖아요. 저는 희생하지도 않을 뿐더러 아이들에게 ‘힘내’라고만 위로하는 것이 아닌, ‘나는 장애를 가지고 있고, 어떤 게 힘들었고, 어떻게 힘을 내게 됐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죠.”

청춘,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니?

구 작가는 지금도 ‘청춘’을 보내고 있다. 그에게 ‘청춘’은 꿈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다. 그 긴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계속되는 실패와 좌절에 힘들고 아프다. 그렇기에 그는 ‘청춘’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서두르지 말라고 우리들을 위로한다. “포기하고 싶을 땐 포기하고 넘어지고 싶으면 넘어져요. 오히려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면 더 힘들거든요. 저도 계속 포기하고 넘어져왔어요. 넘어졌다가 조금 쉬었다 다시 일어나도 괜찮아요.”

계속 쉼 없이 달리라고만 하는 사회에서, 어쩌면 우리는 ‘쉬었다가도 돼’라는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 쉼 없고 알 길 없는 뜀박질 속에서 우리들은 지쳐가고,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어진다. 우리, 잠시 숨 한 번 고르고 가자. 꿈을 찾아가는 우리의 긴 ‘여정’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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