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최윤정일러스트레이터
‘혁명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햇빛은 강렬하고 하늘은 한없이 푸르다. 길었던 추위는 진작 끝이 났고 이제는 꽃들마저 떨어져 버렸다. 더운 계절이 찾아오기 전, 요즘 같은 때가 혁명을 일으키기 가장 좋은 날이 아닐까 싶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한다. 혁명가에게 있어서 게으름이란 죄이면서 악이다. 위대한 혁명은 하루아침에 찾아오지 않기에 부지런히 혁명의 순간을 준비해야 한다. 검은 베레모, 구겨진 군복, 무성한 수염, 완벽하다. 공들여 만든 혁명군 모집 전단을 들고 방을 나선다.

눈치 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위대한 혁명가 체 게바라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세계 이곳저곳을 누비며 혁명의 불길을 일으키던 영웅 체 게바라가 아니다. 환생을 한 것인지 시간여행을 온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내가 살던 곳과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 있다. 한창 혁명가로 이름을 날리던 때로부터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동방의 작은 나라의 작은 동네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다.

“야 이놈아! 날도 더운데 그 모자랑 옷 좀 벗고 다녀라. 좀!”

오늘도 어김없이 할멈의 우렁찬 잔소리로 하루가 시작된다. 이 할멈은 내가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이 집 주인이다. 거칠고 난폭해보이지만 나를 친손자처럼 아껴주는 마음씨 고운 노인이다. 언제나 할멈한테 고마우면서 미안한 마음이다. 할멈이 더 늙기 전에 혁명을 성공시켜 은혜를 갚아야 할 텐데….

“이 놈이 할미가 말하는데 들은 체도 안하고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여!”

짝! 등짝을 한 대 맞았다. 매섭다. 아직 할멈의 원기가 쌩쌩한 것 같다. 은혜는 천천히 갚아도 될 것 같다. 

 “뭐여. 다 큰 놈이 한 대 맞았다고 울어? 어이구”
“아니에요. 울긴 누가 울어요. 할멈. 나 나갔다 올게요.”

집을 나서 동네에서 그나마 사람이 많은 시장으로 향한다. 옆 동네만 해도 높은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이 동네는 좁은 골목들에 허름한 집들이 빽빽이 가득 차있다. 혁명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법. 내가 이런 빈민가에서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반드시 혁명을 성공시켜 죽어가는 이 동네를 일으켜 세우리라.

요즘은 혁명군 모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혁명을 일으키려면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줘야 하는데 이 곳 사람들은 혁명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전단을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혁명군을 모집할 생각이다.
 
“동철 씨! 어디 가세요?”

저 사람은 조 순경이라고 동네 파출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나를 동철이라고 부른다. 대놓고 체 게바라인 나를 못 알아보고 동철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부르다니! 기분이 조금 상하지만 내가 위대한 혁명가라는 것을 알면 모두 깜짝 놀랄 테니 그냥 참고 지낸다.

“혁명군 모집? 오늘도 열심히 하시네요. 동철 씨”

저 멍청한 경찰 놈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나를 당장 잡아가도 시원치 않을 판에. 어휴. 이러니 이 나라가 이 모양이지. 근데 이름을 한 번 부르면 됐지 왜 자꾸 부르는 거야. 난 동철이가 아니라 체 게바라라고. 이 나라를 뒤집어엎을 거란 말이야.

“동철 씨. 동철 씨?”
“아, 네. 조 순경도 수고하시오”
“네. 안녕히 가세요. 동철 씨”

동철 씨, 동철 씨 몇 번을 말하는 거야. 그렇게 동철 씨가 좋으면 이름을 바꾸던가. 너는 내가 혁명만 성공하면 바로 해고시켜버릴 거야.
 
***
시장을 계속 돌아다니다보니 다리가 아파 놀이터 벤치에 잠시 앉았다. 혁명가에게 강인한 체력이 필요한데 체력이 부족해서 큰일이다. 내일 아침부터 운동을 해볼까. 아니야.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데 무슨….

“대장! 대장!”

저기 저 통통한 꼬마는 혁명군의 유일한 동지이자 유일하게 내가 체 게바라인 것을 아는 사람이다. 아직 어리지만 분명 크게 될 싹이 보인다. 그래서 이 동방의 작은 혁명군에게 과거 쿠바에 있을 때 만났던 동방의 지도자 이름을 따서 ‘일성’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살집이 통통한 게 아주 잘 어울리는 애칭이다.

“대장! 바티스타가 나타났어요!”

바티스타?! 이 동네는 가난한 동네지만 부유한 집이 딱 한 군데 있다. 바로 이 동네와 시장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박 사장의 집이다. 바티스타는 바로 이 박 사장의 딸이 키우는 검은 색 사냥개다. 바티스타는 과거 쿠바혁명으로 끌어내린 독재자의 이름으로 혁명군에게 가장 큰 적이라서 내가 붙여준 이름이다. 바티스타에 가려진 박 사장의 딸은 ‘혜지’라는 소녀다. 동그랗고 두꺼운 안경을 쓰고 주근깨가 두드러진 이 녀석은 몹시 심술궂은 녀석으로 항상 일성을 괴롭힌다. 원래 혜지는 바티스타에게 ‘짜왕’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을 붙여줬지만 바티스타란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바티스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성이 이 뚱땡아! 그만 도망치시지! 어?! 체 게바라. 당신도 여기 있었군.”

혜지는 굉장히 미운 녀석이지만 나를 체 게바라라고 부르는 것만큼은 몹시 만족스럽다. 혜지 옆에 있는 바티스타는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우릴 향해 뛰어올 듯 그르렁거리고 있다. 목줄이 우리의 생명줄을 지켜주고 있었다.

“바티스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게. 너는 하나도 안 무서워. 이 안경잡이 주근깨야.”
일성이 혜지를 도발한다.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뭐! 말 다 했냐. 너 죽었….”

턱. 꽈당. 화가 난 혜지가 일성을 향해 달려오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지고 혜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혜지는 넘어지면서 바티스타를 자유의 몸으로 놓아주었다. 순간 모든 것이 느려졌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성아. 도망…. 넌 왜 벌써 정글짐 위에 올라가 있는 거야. 생긴 것과 다르게 굉장히 날렵하잖아.

“대장! 도망쳐!”

바티스타는 사냥개의 본능에 충실하게 맹렬히 나를 쫓았다.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친다. 골목을 따라 계속 뛰었다. 바티스타의 우렁찬 짖는 소리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 점점 숨이 차오른다. 기침이 멈추질 않는다. 정신이 혼미해져 간다. 저기 앞에 저긴 어디지? 꽃으로 가득 싸여 있는데 천국인가? 아. 나는 죽는 거구나. 어? 당신은 누구? 천사인가? 더 이상 못 뛰겠다. 털썩.

동철 씨, 아니 체 게바라 씨는 다행히 죽지 않았다. 위험하긴 했지만 잠시 의식을 잃었을 뿐이다. 체 게바라 씨는 어린 시절의 꿈을 꾼다.

어린 동철 씨, 아니 체 게바라 씨, 아니 어린 동철 씨가 맞을 것이다. 어린 동철 씨는 두려움에 떠는 날들을 보냈다. 어린 동철 씨의 집에는 바티스타보다 무서운 아버지가 있었다. 어머니는 동철 씨가 더 어렸을 때 이미 천국으로 가버렸다. 어머니가 천국으로 간 후 아버지는 술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갔다. 술과 하나가 된 아버지는 극도로 난폭해졌고 바티스타보다 맹렬하게 어린 동철 씨를 공격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와서 막걸리를 먹어 그랬는지 그날따라 아버지의 공격이 매서웠다. 할멈의 등짝 때리는 것의 몇 배는 됐을 것이다. 어린 동철 씨의 기침은 멈추지 않았고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어린 동철 씨는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했다. 의식을 잃기 전 어린 동철 씨의 눈은 TV화면을 향하고 있었다. TV화면 속에는 다큐멘터리인지 영화인지 위대한 혁명가 체 게바라의 위풍당당하고 강인한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린 동철 씨는 쓰러졌다. 어린 동철 씨는 다행히 죽지 않았고 위험하긴 했지만 잠시 의식을 잃었을 뿐이었다.
***
헉! 악몽을 꿨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바티스타한테 쫓기다가 쓰러졌었는데. 다행히 죽지는 않은 것 같다.

“아이고. 동철아! 어쩐 일이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여.”
“동철 씨! 괜찮아요?”
할멈…. 조 순경…. 아니 조 순경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괜찮으세요?”

어? 이 여자는 천사!

“야 이놈아. 얼른 감사하다고 해라. 이 처자가 너 쓰러진 거 신고해가지고 살려주신 거여.”
“맞습니다. 동철 씨. 이 분이 저희 파출소로 신고해주셔서 제가 바로 출동해서 병원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그렇게 된 거구나. 진짜 천사 같은 여자다. 그런데 머리는 조금 안 좋은 것 같다. 사람이 쓰러졌으면 119를 불러야지. 왜 경찰한테 전화를 해서 이 멍청한 순경 놈을 부른 거야.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별 말씀을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아름답다.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여자다.
“동철 씨. 박 사장님 댁 개는 저희가 집으로 잘 데려다 줬습니다. 동철 씨. 근데 개랑 산책하다가 갑자기 쓰러지신 거 에요?”

조 순경의 해고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혁명을 성공시켜야겠다.
 
***
천식 발작. 곧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고 실제로 생명의 위협이 올 수도 있는 증상이라고 한다. 천식이 있어서 평소에 격한 운동은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심하게 달리다 보니 일어난 것 같다. 아주 오래 전에도 한 번 겪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난다.

다행히도 잘 치료를 받고 퇴원해서 지금은 평소처럼 지내고 있다. 평소와 달라진 것은 혁명군 활동을 잠시 접어두고 생명의 은혜를 갚기 위해 꽃집에서 일을 하고 있다. 나를 구해준 그녀가 운영하는 꽃집이다.

아름다운 천사와 같은 그녀의 이름은 ‘정화’, 그녀의 미소처럼 아름다운 이름이다.

“체 게바라 씨. 힘드시죠? 조금 쉬었다 하세요.”
“아닙니다. 이런 화분 몇 개 옮기는 것 쯤 일도 아닙니다.”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와 함께 있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꽃집에서 일하며 하루 종일 아름다운 꽃들과 그녀를 보고 있으면 꽃집일 따위 평생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건 그녀는 나를 체 게바라라고 부른다. 그녀가 나를 부를 때마다 내 몸의 모든 감각이 그녀에게 집중한다. 어쩌면 사랑에 빠진 것일까. 이게 행복이라고 하는 것일까.

할멈은 손주 놈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고 기뻐하면서 등을 토닥여주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조 순경은 순찰을 핑계 삼아 꽃집에 자주 들르는데 항상 내 심기를 건드리고 간다. 혜지는 그 날 이후 박 사장한테 크게 혼이 났는지 바티스타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일성과 혜지는 정정당당하게 일대일로 다투고 있다. 바티스타는 그 날 이후로 집에 갇혀 지내는 것 같다.
***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 덧 더운 계절이 찾아와있었다.

“체 게바라 씨는 꿈이 뭐에요?”

어느 무더운 날,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문득 내게 물었다. 꿈. 내 꿈은 뭘까. 혁명? 혁명이라는 게 꿈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혁명가인데 혁명이라는 것은 직업이 아닐까? 그렇다면 꿈은 뭐지?

“나는 엄청 센 무기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미사일 같은 거요. 그래서 나쁜 놈들을 다 물리칠 거 에요.”

일성은 옆에서 해맑게 웃으며 어린 소년다운 꿈을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순간 흠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일성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는 말이죠. 경찰청장이요. 지금은 순경이지만 언젠간 경찰의 우두머리가 될 거에요.”
“나는 공주가 될 거야. 지금도 아빠는 나를 공주라고 부르지만 성에 사는 진짜 공주가 될 거야. 그리고 왕자님이랑 결혼할 거야.”

그녀는 분명 내게 질문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신나서 각자 꿈을 당차게 말했다. 도대체 이 녀석들은 왜 이 꽃집에 있는 거야.

“다들 멋진 꿈을 갖고 있네요. 저는 말이죠. 오래오래 이 꽃집을 지키는 게 제 꿈이에요. 이 꽃집은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제게 남겨주신 선물이거든요. 사실 작은 동네에서 꽃집하면서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끝까지 이 꽃집을 지키고 싶어요. 그게 제 꿈이에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 소박하네요.”
 
부끄러운 듯 웃는 그녀가 너무도 예뻤다.

“언니! 꿈이 그게 뭐야. 시시해.”
“야 이 안경잡이 주근깨야. 니가 공주가 되는 것 보단 훨씬 나아. 공주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하고 있어. 짜증나게.”
“맞아. 이 꼬맹아. 박 사장님이 공주라고 해주니까 자기가 진짜 공주인 줄 아네. 얼른 정화 씨께 사과 드려.”
 
혜지와 앙숙관계인 일성은 그렇다 치고 조 순경은 어째서인지 흥분해서 혜지를 질타했다. 혜지는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조 순경은 안절부절 못하며 아빠에게 이른다고 집에 가는 혜지를 뒤쫓았다. 혜지 녀석이고 조 순경이고 둘 다 꼴좋다. 그녀는 웃으며 둘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내게 물었다.
 
“체 게바라 씨는요?”
“네. 제 꿈은….”
***
모두와 꿈 이야기를 나눴던 그날 밤도 체 게바라 씨는 꿈을 꾸었다.

체 게바라 씨는 아름다운 꽃밭에서 모두와 함께 뛰놀고 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이는 체 게바라 씨. 그 때, 저 멀리서 검은 물체가 다가온다. 형태를 분간할 수 없는 그저 검은 물체. 검은 물체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모두들 도망친다. 하지만 하나둘씩 검은 물체에게 잡아먹힌다. 혜지, 조 순경, 할멈, 일성, 그리고 그녀.

체 게바라 씨는 모두를 되찾기 위해 검은 물체에 맞서려하지만 숨이 차고 기침이 나와 이내 쓰러져버린다.
 
“니 행복은 여기까지야. 너 같은 겁쟁이 따위에게 이런 행복은 과분하지. 넌 평생 혼자 어둠속에 갇혀 사는 게 어울린다고.”

검은 물체의 사악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검은 물체는 체 게바라 씨의 몸을 뒤덮는다. 겁에 질린 체 게바라 씨는 어느새 어린 동철 씨의 모습을 하고 있다.
***
나비효과라는 이론이 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이론이다. 매우 공감하는 이론이다. 모든 커다란 일은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한다. 그 날의 일도 그랬다.

햇빛이 유난히 뜨겁고 강렬했던 어느 날, 옆 동네의 꽤나 잘 사는 집 부인이 이 동네를 지나가고 있었다. 더위를 잠시 잊으려 카페에 들어가 음료를 마시고 있었는데 우연히 맞은편의 꽃집이 보였다. 부인은 그 꽃집의 꽃들에 운명적으로 매료되었다. 부인은 당장 꽃집으로 들어가 대량으로 꽃을 주문했다. 갑작스러운 대량주문에 그녀와 나는 무더운 날씨에도 분주히 꽃을 준비했다. 부인은 몹시 행복해하며 꽃을 가지고 돌아갔다. 더위와 고된 노동에 땀범벅이 된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했다. 아이스크림을 먹던 그녀는 문득 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당차게 자신의 꿈을 말한 혜지는 다음 날 학교에서 공주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게 되었다. 하루 종일 놀림에 시달린 공주는 집에 와서 바티스타를 찾았다. 공주의 아버지는 상태가 안 좋은 바티스타를 공주가 못 데리고 다니도록 금지시켰다. 하지만 공주의 아버지는 일성의 혼신을 다한 조롱을 이겨내지 못했다.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공주는 바티스타를 데리고 대문 밖을 나섰다.

그 날도 예전 어느 날과 같이 놀이터에서 바티스타와 함께인 혜지와 일성이 대치했다. 놀랍도록 전과 똑같이, 멍청한 공주는 똑같은 곳에 걸려 똑같이 넘어졌고 똑같이 바티스타에게 자유를 주었다. 일성은 똑같이 재빠르게 정글짐 위로 올라갔고 바티스타 역시 꽃집이 있는 방향으로 맹렬히 달렸다. 달라진 것은 혜지는 공주가 되었고 무더운 날 바티스타의 상태는 전보다 훨씬 심각했고 나는 옆 동네 꽤나 잘 사는 집으로 배달을 가있었던 것이다.

주인만큼 멍청하고 상태가 안 좋았던 바티스타는 쫓을 상대가 없었음에도 꽃집방향으로 달렸고 꽃집 앞에 도착했다. 사냥개에게 사냥감을 놓친 것만큼 분한 일이 또 무엇이 있을까. 바티스타는 꽃집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혼자 꽃집을 지키던 그녀에게 더위 먹은 사냥개는 지옥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개와 같았으리라.

내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바티스타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천국은 폐허로 변해 있었고 천사는 벌벌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혁명가로서 혁명에 소홀히 했던 나에게 신이 내린 벌인가. 그렇다면 저기 울고 있는 천사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고 있는 것인가.

다음 날, 동네에는 바티스타를 수배하는 전단이 곳곳에 뿌려졌다. 평화로운 동네의 한가한 파출소 직원들도 시장의 상인들도 바티스타의 행방을 찾는데 열심이었다. 박 사장이 바티스타에게 꽤나 큰 금액의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이다. 박 사장은 자기 딸의 개를 찾는데 큰돈을 걸었지만 그 개가 망쳐놓은 꽃집의 배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다.

그녀는 엉망이 되어버린 꽃집을 정리하지 않았고 꽃집에 나오지도 않았다. 언제나 환한 미소를 짓던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 놈을 가만 둘 수 없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 누구보다 먼저 바티스타를 찾아내서 혁명가의 무서움을 보여주리라.
***
며칠 후 평소에는 무능해보이던 파출소 경찰들이 바티스타의 행방을 찾아냈다. 조 순경을 통해 긴급히, 은밀하게 정보를 입수했다.

“동철 씨. 바티스타가 동네 뒷산에 있대요. 여기저기서 제보 받아서 겨우 알아낸 거 에요. 오늘은 이미 어두워져서 내일 수색하러 간다고 하니까 내일 아침 일찍 올라가시면 찾을 수 있을 거 에요. 이거 진짜 1급 비밀이에요. 제가 말했다고 하면 안돼요. 특별히 동철 씨니까 제가 알려드리는 거 에요.”

왜 나한테 이런 정보를 알려주는 거지.

“일성이한테 들었는데 동철 씨, 바티스타한테 복수할 거라면서요. 경찰이나 다른 사람들이 찾으면 바티스타한테 손도 못 대요. 박 사장님 입김이 보통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경찰이 잡으면 현상금도 못 받을 거구요. 정화 씨한테 정말 소중한 꽃집을 망쳐놓은 놈인데 가만히 집으로 돌려보낼 순 없죠. 위험하실 텐데 조심하시고 복수 꼭 부탁드려요. 동철 씨.”

조 순경, 이 사람도 꽤나 괜찮은 사람이었구나.  
 ***
집으로 돌아와 바티스타와 싸울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웠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 뒷산에 올라가 바티스타를 쓰러뜨릴 것이다.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잠이 들어야 하는데 밤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두렵게 만든다. 과연 내가 바티스타와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사냥개한테 잘못 물리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 두려워진다.

하지만 그녀를 생각하자. 생명의 은인이자, 내게 행복을 알려준 그녀를 생각하면 약해질 수 없다. 그녀를 위해 싸워서 이길 것이다. 아니, 이겨야만 한다.

그녀를 처음 본 날이 떠오른다. 바티스타에게 쫓기던 그 날 나를 구해주었던 천사. 그 날의 나는 개한테 쫓기던 겁쟁이에 금방 죽을 듯 했던 약골이었다. 그렇지만 내일의 나는 다를 것이다. 천사의 천국을 망쳐놓은 지옥의 개를 반드시 쓰러뜨리고 천사의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 천국을 다시 되찾을 것이다. 진정한 혁명가의 위대함을 보여…….
 
***
체 게바라 씨는 내일의 승리를 다짐하며 잠이 들었다. 체 게바라 씨는 오늘도 꿈을 꾼다.

꿈속에서 체 게바라 씨는 뒷산에 올라 바티스타를 찾고 있는 듯하다. 한참을 찾다가 가만히 앉아 있는 검은 물체를 발견한다. 바티스타의 뒷모습같다.
 
“바티스타!!!”

체 게바라 씨는 힘차게 바티스타를 부른다. 패기 넘치는 체 게바라 씨의 목소리에 검은 물체는 뒤 돌아본다. 하지만 이게 웬일. 그 검은 물체는 바티스타의 몸에 동철 씨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체 게바라 씨는 당황하며 급격한 두려움에 몸을 떤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심지어 눈도 깜빡이지 않는다. 숨도 멎어버린 것 같다.

아버지의 얼굴을 한 바티스타는 점점 체 게바라 씨에게 다가온다. 다가오면서 커지는 아버지의 얼굴. 이제는 저 것이 아버지인지 바티스타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는다. 체 게바라 씨는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기침은 멈추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진다.

“혁명? 체 게바라? 웃기지마. 너는 그저 나약한 겁쟁이에 불과해. 니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침이나 하면서 얻어맞는 일 뿐이야. 개랑 싸운다고? 웃기지도 않는군. 개한테 물리고 할퀴어서 내일은 걸레짝이 될거야. 니 장례식장의 꽃은 그 여자한테 부탁하면 되겠구만.”

아버지의 사악한 목소리가 체 게바라 씨를 푹푹 찔러댔다. 체 게바라 씨는 심한 기침에 한 번의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진다. 멈추지 않는 기침이 서럽고 아버지의 말이 사실 같아 서럽고 눈에서 흐르는 눈물에 또 서러워 흐느낀다.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체 게바라 씨를 공격한다. 아니, 체 게바라 씨는 어느 새 어린 동철 씨가 되어 있다. 점점 의식을 잃어가는 어린 동철 씨. 희미해지는 시야에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
헉! 지독하고 끔찍한 악몽이었다.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바지춤을 만져보지만 다행히 큰 사고는 치지 않은 것 같다. 꿈이라는 허상에 마음을 뺏길 여유 따위는 없다. 시계를 보니 다행히 늦게 일어나진 않은 것 같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사냥개이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사냥개의 가장 위협적인 무기는 바로 이빨이다. 한 번 잘못 물어뜯기면 그 순간 승부가 결정된다. 내 생사가 결정될지도 모른다. 일단 겨울에 입던 두터운 군복을 입는다. 팔과 다리에는 두꺼운 옷감을 칭칭 감는다. 장갑과 머플러로 온몸의 살을 감춘다. 그리고 군화와 오토바이용 헬멧으로 마무리한다. 완벽한 방어복장이다.

할멈이 나를 정신병자로 신고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방을 나선다. 역시나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하지만 이내 평소와 같이 행동한다.

“이 미친놈이 쪄죽을라고 작정을 했다냐. 이게 뭔 난리여. 난리가.”

매섭게 등짝을 후려친다. 전혀 아프지 않다. 할멈의 등짝 때리기만큼 확실한 테스트도 없다. 자신감이 생긴다. 할멈. 바티스타를 쓰러뜨리고 돌아와서 모든 것을 설명해줄게요. 나는 미친 게 아니에요. 할멈에게 비밀로 하고 나가는 것에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혁명가 가는 길,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서둘러 현관을 나선다.

“기다려. 이 놈아. 이거 가면서 먹어. 주먹밥 좀 쌌다. 조심히 다녀 와.”

뭐지. 많은 생각이 들지만 그럴 시간조차 없다. 손을 들어 힘차게 주먹을 쥐어 보이고 집을 나선다.
***
뒷산을 향해 진격한다. 주먹밥을 먹고 싶지만 완전무장한 상태에서 주먹밥을 먹기가 쉽지가 않다. 아쉽지만 할멈의 주먹밥을 가방에 넣었다. 전투에서 이긴 뒤 승리의 만찬으로 먹어야겠다.

결전의 장소, 뒷산 입구에 도착했다. 조용한 걸 보니 경찰이 수색하러 오려면 꽤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다. 뒷산을 올려다보며 크게 심호흡을 한다. 기합을 넣고 산을 오른다.

“대장! 대장!”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니 일성이 힘차게 달려오고 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대장! 저도 혁명군인데 저를 빼놓고 오다니 섭섭해요!”
“너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고 온 거야? 진짜 위험하다고.”
“자꾸 섭섭한 소리 하지 말아요. 저도 용맹한 혁명 전사라구요.”
“좋았어. 같이 가자! 바티스타를 쓰러뜨리자고!”
“좋아요!! 근데 대장 완전무장하고 왔네요.”
“당연하지. 상대는 사냥개야. 잘못 물리면 한 번에 끝 날수도 있어.”
“오... 그럼 저는 뒤에서 엄호할게요. 비비탄 총 가지고 왔어요.”
“그래. 이제 올라가서 바티스타를 찾아보자.”
***
뒷산을 돌아다니며 한참을 찾았지만 바티스타는 보이지 않았다. 무장한 상태라 몸이 무거워 벌써 숨이 차고 기침이 나왔다. 곧 있으면 경찰들이 출동해 뒷산을 수색할 것이다. 시간이 얼마 없다. 바티스타를 불러낼 방법이 없을까. 집을 나서기 전 할멈이 줬던 주먹밥이 생각났다. 주먹밥을 꺼내 뒷산 군데군데에 뿌려두었다. 잠시 기다렸더니 검은 물체 하나가 보였다. 바티스타였다.

“대장! 바티스타에요!”

몸을 숨겼다. 긴장된다. 하지만 침착해야 한다. 강력한 선제공격으로 기선제압을 해야 한다. 짱돌을 던져 볼까? 잘못 맞아서 죽으면 어떡하지? 아니야. 바티스타는 나를 죽일 수도 있다.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 죽일 각오로 싸워야 한다.

탕. 생각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경쾌하면서도 경미한 총소리가 들렸다. 옆을 보니 일성이 몸이 굳은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바티스타가 우릴 향해 달려 왔다. 챙겨왔던 야구방망이를 꺼내 달려드는 바티스타를 향해 휘둘렀다. 방망이는 힘차게 허공을 휘둘렀고 바티스타는 내 어깨를 밟고 나를 뛰어 넘었다.

재빨리 몸을 돌려 바티스타와 대치했다. 순간 헬멧을 안 쓰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바티스타가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두려움이 몸을 지배해서인지 방망이는 목표를 잃고 또 한 번 허공을 휘저었고 바티스타는 방망이를 내게서 빼앗아갔다. 헬멧도 없고 방망이도 없고 남은 건 두껍게 만든 옷가죽 뿐이다. 이제 두려움이 몸을 넘어 정신까지 지배해 간다. 두렵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바티스타는 이번엔 내 팔을 물었다. 옷감을 두껍게 감아서 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물고 늘어지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무는 힘에 이끌려 뒤로 넘어지고 옷감마저 찢어져 나갔다.

몸을 일으켜 바티스타를 바라봤다. 어제 꿈이 떠올랐다. 바티스타가 무언가 말하는 것 같았다.

“나약한 겁쟁이 녀석. 나를 이기겠다고? 니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제 너는 걸레짝이 되는 일만 남았어. 그 여자는 처참한 니 모습을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겠지.”

나는 혁명가가 아니었나. 나는 결국 나약한 겁쟁이인가. 바티스타는 그르렁 한 번 짖더니 마지막 일격을 위해 달려들었다. 나는 진짜 겁쟁이인가 보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몸이 꿈쩍하지 않는구나. 나는 이제 진짜 죽는구나.

탕. 그 순간 하얀 좁쌀만 한 작은 총알이 바티스타의 얼굴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나를 향해 달려들던 바티스타는 멈추고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봤다. 일성이 벌벌 떨며 뒤로 주저앉았다. 바티스타는 몸을 돌려 일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성은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일성의 바지춤은 진하게 물들어갔다.

그 때, 나를 지배하던 두려움이 어디로 갔는지 나는 일성을 향해 달렸다. 일성을 향해 달려드는 바티스타에게 몸을 던졌다. 다행히 늦지 않게 바티스타를 몸으로 밀쳐냈다. 바티스타는 다시 몸을 뒤로 뺀 뒤 달려들었다. 몸을 던져 일성의 몸을 덮었다.

탕. 다시 한 번 총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큰 총소리였다. 내 등엔 바티스타의 이빨이 아닌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몸을 일으켜보니 바티스타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일성이는 바지에 경미한 사고를 저지르고 기절해있었다.
 
“동철 씨! 괜찮아요? 동철 씨.”

조 순경이 연기를 내뿜는 총구를 내리고 나를 향해 뛰어왔다.

“괜찮습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갑자기 옆구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옆구리를 보니 찢겨진 군복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피가 줄줄 새어나왔다. 호흡이 거칠고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기침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다 잘 끝난 줄 알았더니 아니었구나. 털썩.
 
체 게바라 씨는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기침은 점점 심해져갔다. 희미해지는 시야에 어린 시절 TV에서 봤던 체 게바라의 모습이 보였다. 체 게바라 씨는 어린 시절 그 때를 떠올렸다.

기침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체 게바라 씨! 체 게바라 씨!”

순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체 게바라 씨는 이 목소리에 집중했다. 곧 체 게바라 씨의 시야에 정화가 나타났다.

“체 게바라 씨! 괜찮으세요?”

정화가 울먹이며 말했다. 체 게바라 씨는 이 순간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체 게바라 씨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눈을 감았다. 어느덧 기침은 멎어 있었다.
 
“동철아. 동철아.”
“동철 씨!”
“대장!”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부스스 눈을 뜬다. 할멈, 일성, 조 순경 그리고 그녀. 다시 눈을 감고 바티스타와의 전투를 떠올린다. 모든 것이 잘 된 것 같다. 옆구리를 보니 심각하게 다치진 않은 것 같다.
 
“임동철 씨.”

그 때,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와 무언가를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임동철. 임동철. 체 게바라가 아니라 임동철. 오랜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다. 체 게바라라니. 실소가 나온다. 머리가 아프고 복잡하다.

“동철아.”

할멈, 아니 할머니가 내 이름을 부른다.

“할멈. 아니, 할머니. 죄송해요. 할머니. 할머니.”

눈물이 흐른다. 할머니도 나를 껴안고 눈물을 흘린다.
혁명놀이는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났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
해리성 장애. 어릴 때 겪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과거기억을 상실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증상이다. 그 동안 임동철이 체 게바라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겁쟁이가 두려웠던 어린 시절 기억을 지우고 쎈 척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다시 임동철로 돌아왔지만 아직 과거의 기억들을 온전히 찾은 것은 아니다. 병원에서도 그렇고 할머니도 그렇고 무리해서 과거 기억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고 한다. 나도 딱히 상관없을 것 같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할머니의 청과 일을 도왔다. 할머니는 청과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 죄책감과 할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열심히 할머니를 도왔다. 지금은 할머니와 둘이서 소중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잘 지내고 있다. 바티스타를 쏜 조 순경은 특진을 했고 일성이는 바티스타를 쓰러뜨리는데 기여한 용감한 어린이가 돼서 학교의 영웅이 되었다. 바티스타는 뒷산에 묻혔고 바티스타를 잃은 혜지는 박 사장을 졸라서 얻은 ‘짜왕’이라는 검갈색의 작은 푸들을 데리고 다닌다. 박 사장은 바티스타의 소동이 커지자 책임을 지고 나와 일성이를 비롯한 피해자들에게 모두 배상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그녀가 청과를 찾아왔다. 검은 베레모와 빨갛고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들고. 체 게바라의 상징이었던 검은 베레모와 혁명의 빨간 꽃 한 송이.

“체 게바라 씨.”

나는 더 이상 체 게바라가 아니다. 임동철이다. 하지만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그 때로 잠시 돌아가도. 그녀에게 검은 베레모를 받아서 쓰고 꽃을 받아 한 손에 들었다. 남은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정화 씨. 저번에 이야기했던 거 있잖아요. 제 꿈이요. 생각났어요. 제 꿈은….”
 
‘진짜 혁명가는 위대한 사랑에 의해 인도된다.’
위대한 혁명가 체 게바라가 한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체 게바라가 아니지만 진짜 혁명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체 게바라 씨인가, 동철 씨인가. 어찌되었든 그가 기다리던 혁명의 계절은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피우며 이미 성큼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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