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상태가 나빠진 어느날...
딸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상태가 나빠진 어느날...

“영원한 상실은 없으니까.”

<스틸 앨리스>(Still Alice, 2014)를 보면서 메모해 둔 문장, “영원한 상실은 없으니까.” 이 메모를 나중에 들여다보면서, 어디 장면에서 누가 한 대사였더라, 떠올려 봤다. 앨리스 역을 연기한 줄리안 무어가 했던 말이었나…. 결국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저 대사를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다시 만났다. 앨리스를 돌보기 위해 연극을 포기하고 엄마의 곁으로 날아온 천사, 딸 리디아(크리스틴 스튜어트). 리디아는 언어를 잃은 엄마에게 토니 쿠시너(Tony Kushner)의 희곡 <미국의 천사들(Angels in America>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준다.

“고요한 공기로 된 거대한 띠가 나타난다. 그리고 오존층에 가까워진다. 우리가 함께하길 꿈꾸던 곳, 권계면을 뛰어넘자 가장자리에 맑은 공기가 와 닿았다. 오존층은 해지고 찢겨 낡아버린 무명천 같았다. 그 모습이 무서웠다. 하지만 난 볼 수 있었다. 그걸 볼 수 있는 내 놀라운 능력 덕에 영혼들이 솟아오르는 것을. 저 아래 땅에서 배고픔과 전쟁, 전염병으로 죽은 망자들의 영혼이 스카이다이버처럼 거꾸로 솟아오르더니 팔다리를 활짝 펴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영혼들은 서로의 손발을 잡고 그물망을 만들었다. 산소 원자가 된 영혼들은 셋씩 모여 오존 분자가 되었고 낡은 오존층을 다시 고쳤다. 영원한 상실은 없으니까.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고 앞으로를 꿈꾸며, 고통스럽지만 나아가는 여정만이 있을 뿐.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다 읽은 뒤 리디아는 앨리스에게 묻는다. 무엇에 관한 이야기 같냐고. 앨리스는 더듬더듬 입을 떼어 말한다. “Love(사랑).” 내 모든 기억이 빠져나간 뒤, 죽음 앞에서 앨리스가 내 뱉은 단어, 사랑.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래 그건 모두 사랑에 관한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존경받는 대학 교수인 앨리스는 50세의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를 판정받는다. 알츠하이머 요양원 시설을 둘러보고 온 뒤 앨리스는 그의 노트북에 'butterfly'라는 폴더를 만들고 그 안에 동영상 하나를 저장해 둔다. 병이 악화된 앨리스는 그 자신이 남겨놓은 동영상을 보게 된다. 동영상 속 자신의 말처럼, 이제 더 이상 자신이 던지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상태의 앨리스였다.

화면 속 다소 멀끔한 ‘내’가 그 자신에게 주는 메시지를 앨리스는 불안한 눈으로 본다. 하지만 흔들리는 눈빛에는 힘이 느껴졌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전달받았다는 듯.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 앨리스는 동영상을 보고 2층 침실에 올라서다 그 다음에 할 일을 까먹고, 다시 까먹고. 결국 노트북 째를 들고 침실에 들어서고, 서랍장에서 강력한 수면제가 든 알약통을 발견한다. 기억을 잃기 전 자신의 당부대로 알약을 한 번에 입으로 털어 넣으려는데, 때마침 집에 온 가정 도우미 소리에 손에서 약을 놓치고 만다.

우리는 가끔 상상한다.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 내가 나의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가 나인지조차 까먹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조용히 잠을 자는 것처럼 죽는 편을 선택하는 게 나을는지, 아니면 나는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어떤 선택이 정답인지.

나를 있게 해준 나의 순간에 우리가 머물러 있는지를 생각한다. 살면서 모아온 모든 기억, 그것의 소중함을 우리는 정말 알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알츠하이머에 걸리지 않았지만,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처럼 나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을까? 여기서 다시, “영원한 상실은 없으니까.(Nothing’s lost forever.)” 우리는 고통 받는 순간마다 상실을 경험하지만, 우리에게 영원한 상실이란 없을지 모른다. 나는 나로,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내 몸과 머리에 축적된 나의 기억들은 나를 나로 있게 만들었고 설령 그것들을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상실은 없다.” 아직 내가 나와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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