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피곤하고 복잡한 세상이다. 미국은 정치인이 할 수 있는 모든 막말을 일삼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고 있고, 필리핀에서는 ‘정의 구현’ 위해 인권은 아랑곳하지 않는 두테르테가 신문의 국제란을 장식하고 있다. 그들의 몇 마디는 현재와 머지않은 미래에 나의 삶에도 영향을 줄 것 같아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이제는 혼자 앉아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방법도 잊은듯하다. 스마트폰은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내 손을 떠나지 않고 연신 sns의 알림을 통보한다. 항상 누군가에 노출해야 하고 노출되게끔 하는 이 스마트한 시대는 이미지의 정보로 채워지고 넘쳐난다. 비난, 신념, 욕구, 거짓, 욕설 등이 사실과 뒤엉켜 이제 우리 자신이 쫓는 것이 실재인지 가상인지 헷갈린다.
 
자신을 둘러싼 이미지의 홍수는 직접적인 언어적 표현이나 행동의 강요에서 부터 미디어, 가족, 공간 등에 이르기까지 부지불식간에 우리들의 정신과 육체를 현재의 질서에 틀 지운다. 여러 겹의 고정된 이미지가 얽히고 설켜 우리의 자유를 질서의 세계로 끄집어들인다.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려는 순간 질서의 그림은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더 단단히 고정시키거나 여의치 않으면 우리를 낙오자로 완전히 지워버리고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 질서의 세계를 벗어난 순간 사회는 다양한 육체적·정신적 징벌로 우리에게 고통을 가한다. 그 고통에서 우리는 다시 질서의 세계로 편입되느냐 완전한 낙오자가 되느냐의 갈림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다수가 가치가 있다 여기는 길의 반대 방향을 보고 걷는다면 촘촘히 짜여진 질서의 세계 틈바구니에서 어느 정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반대 방향을 향해 가는 것은 위태롭게 벼랑 외길을 붙들고 가는 일이다. 그 여정을 이겨내 진정한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낭떠리지에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을 이겨내며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야 하는 고독과 고통이 뒤따른다. 스스로 자신을 고립시킨 사람은 이제 질서의 세계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자신을 고독의 밑바닥까지 끌어 당겨야 할 것이다. 그곳에서 세상과 가졌던 끈의 흔적들을 지우고 세상이 아닌 자신의 내면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철저히 다수의 반대나 그 길에서 벗어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탐색한다. 다수와 반대되는 시각은 이제까지 보이진 않았던 세계에 숨겨져 있던 의미들을 발굴하고, 기존의 대상에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한다. 그 의미는 기존 질서의 세계가 부여했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때로는 혼란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깊은 고독의 경험은 어떤 대상이나 현상도 나를 중심으로 자유롭게 반복해서 들고 나옴을 가능케 한다. 동일한 이미지도 시간과 공간과 경험 등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내 시각에 의해 덮어져 있던 의미들은 하나씩, 때로는 동시에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 의미들은 이제 다른 의미들과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구성원으로서 고통과 고독은 피해야할 상대로 여겨진다. 하지만 고통을 즐겼던 사드와 고독과 인생을 함께 했던 장 주네처럼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경험한다면 전혀 다른 길을 나에게 선사할 것이다. 초록빛이 옅어가는 가을, 최대한 깊숙이 홀로 길을 걷자.
▲ 강내영(사회학과 박사과정)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