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에 방영되었던 엔드류 니콜 감독의 영화 ‘In Time’은 시간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주제였다. 현금과 카드가 사라지고 이를 대신해 시간이 그 자리를 메웠다. 커피 1잔에 4분, 권총 1정에 3년, 스포츠카 1대는 59년이다. 모든 비용은 시간으로 계산된다.
 
근로자들의 임금도 시간으로 지불되었다. 따라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과학이 발달된 먼 훗날 인류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25세가 되면 노화를 멈추고, 팔뚝에 새겨진 ‘카운트 바디 시계’에 1년의 유예 시간을 제공받는다. 이 시간으로 사람들은 음식을 사고, 버스를 타고, 집세를 내는 등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시간으로 계산한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을 모두 소진하고 13자리 시계가 0이 되는 순간, 그 즉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때문에 부자들은 몇 세대에 걸쳐 시간을 갖고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된 반면, 가난한 자들은 하루를 겨우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노동으로 사거나, 누군가에게 빌리거나, 그도 아니면 훔쳐야만 한다. “살고 싶다면, 시간을 벌어라!” 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돈과 카드와 바코드는 먼 옛날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부쩍 늘었다. 더 나아가 TV에서도 이를 다투어 드라마 하고 있다. 시간이 대단한 관심꺼리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인류는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또 그것을 정확히 재기 위해 부단히 경주해 왔다. 전통시대에 시간은 제왕만이 관리하고 측정했던 통치수단이었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뒤에 인류는 시간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조선 세종 15년(1433)에 장영실은 자동 물시계인 ‘自擊宮漏(자격궁루)’를 만들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자격루의 진짜 이름이다. 해시계와는 달리 조선의 물시계 ‘자격궁루’는 궁궐에 설치되어 일반 백성들이 전혀 볼 수 없었다. 물론 이전 시기에도 宮漏(궁루)라는 물시계가 있었다. 궁루와 자격궁루는 물의 중력을 이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자격궁루는 중력의 힘으로 여러 단계에서 동력을 얻어 이를 다른 장치에 전달시켜 시침을 움직였다는 점에서 이전의 궁루와 달랐다. 자격궁루의 제작을 통해 조선은 가히 과학문명의 수준을 한 컷 끌어올렸다. 
 
수많은 경우의 수로 무수한 단순 반복 작업을 통한 이와 같은 경험 과학은 적어도 15세기까지 동?서양 두 대륙 지식인들의 눈높이를 고르게 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서양은 동력을 공식[formula]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다시 말해 동양은 도제화된 경험이 아슬아슬하게 전달되고 있을 때, 그들은 동력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이를 수치화시켜 공유했다. 
 
그런 점에서 영국의 아이작 뉴턴은 갈릴레이를 이어 근대 과학의 역사를 분명히 나눈 사람이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깨달았다는 이 흥미진진한 뉴턴의 이야기는 비록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인류의 과학 발달사에 있어서 대단히 시사한 바가 크다. 뉴턴의 운동 법칙과 보편중력(만유인력)의 법칙은 모두 ‘힘(F)’과 관련된 부분이다. 이후 힘의 수치화와 인식은 동력의 생산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는 근대 산업 혁명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격궁루를 만들었던 장영실은 물이 떨어지는 광경을 헤아릴 수 없이 보고 관찰했을 것이다. 어찌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에 비할까?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위에서 아래로 물을 떨어뜨리는 그 “어떤 힘”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장영실(1390~?)은 떨어지는 물로 돌아가는 시계 소리에 열중했을 것이다. 물시계가 고장이 나면 장영실만이 고쳤다는 것을 보면 이것조차도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는 사이 훨씬 뒤 늦은 시기에 뉴턴(1642~1727)은 물체의 동력을 수치화시켜 구체적인 ‘힘[F]’의 크기로 보여 주었다.

전혀 생소해 보이는 조선 세종대 장영실의 자격궁루와 뉴턴이 찾아낸 중력의 법칙은 이처럼 같은 범주에서 바라보면, 흥미로운 자극을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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