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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과 실리사이에서■ 리더자 실록③ 신숙주
이소희(역사교육·13)  |  news@cnum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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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5.09  00: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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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에 물을 주어서 싹을 낸 나물인 ‘녹두나물’은 우리에게 ‘숙주나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쉽게 변하는 이 나물을 세손(단종)의 앞날을 부탁한 세종의 부탁을 져버리고, 세조의 즉위를 도운 신숙주의 변절에 빗대어 ‘숙주나물’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신숙주는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내놓아 신의를 지킨 사육신과 대조되면서 줄 곧 ‘배신의 아이콘’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신숙주는 조선 초기의 기틀을 다지는데 크게 일조한 당대제일의 석학이었다. 이러한 업적을 세웠음에도 계유정난과 사육신사건 등의 사건으로 그의 업적이 평가절하 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신숙주의 선택은 신권의 문란함으로 인해 왕권이 미약해진 상황 속에서, 더 나은 조선이라는 현실정치에 입각한 현명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계유정난과 신숙주

먼저 계유정난의 경우 흔히 사람들은 계유정난을 묵인한 신숙주의 행동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계유정난은 단순히 세조의 권력욕만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문종이 병으로 승하한 뒤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김종서, 황보인 등의 중신 세력이 조정을 장악한다. 조정을 장악한 김종서 세력은 사적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수수를 하는 등 대권을 남용하며, 대신들의 비행을 탄핵하는 대간들의 언론을 봉쇄한다. 또한 소위 ‘황표정사’라는 시스템을 사용해, 단종은 형식적인 결제만을 할뿐 모든 것은 자신들의 뜻에 따르는 정치를 하게했다. 따라서 계유정난의 주목적은 중신들의 권력횡포에 맞서 왕가의 권위를 되찾는 있었으며, 당시 대간층을 비롯한 훗날 사육신이 된 사람들 역시 이를 묵인하였다. 또한 당시 신숙주는 외관에 나가 있어, 중앙의 계유정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계유정난을 묵인하였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할 수 있다.

사육신 사건

다음으로 신숙주를 비난하는 또 다른 코드는 사육신 사건이다. 사육신은 조선 세조 2년(1456)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가리킨다. 이들은 대체로 세종 때에 설치된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들로 문종의 즉위 이후 조정에 나아갔으며, 신권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여론정치를 지향하였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단순히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반감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조는 집권 후 강력한 왕권을 위하여 세종대의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육조 직계제를 실시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권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여론정치를 지향한 이들이 왕권강화를 꾀한 세조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사육신 사건인 것이다. 실제로 사육신 중 한명인 성삼문은 “진실로 상교와 같습니다. 신은 벌써 대죄를 범하였으니, 어찌 감히 숨김이 있겠습니까? 신은 실상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과 같이 공모하였습니다.” 라고 말하며 공모자들의 이름을 순순히 불었다.

단종 복위 운동의 다른 시각

만일 사육신이라 불리는 그들의 목표가 진정으로 단종의 복위였다면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그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잡혀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남은 사람들이 훗날 단종 복위라는 거사를 다시 도모하도록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은 단종의 복위가 목적이 아닌 세조의 국정운영방식에 불만을 느낀 충동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육신 사건은 ‘계유정난은 인정하면서도 세조의 육조직계제에 반발한 것은 분명 일관성을 잃은 처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육신 사건을 가지고 신숙주를 비난하는 목소리 또한 옳지 않다고 봐야할 것이다.

당대 최고 석학

위와 같이 신숙주는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는 명분과 조선의 발전이라는 두 개의 갈림길에서, 조선의 발전이라는 길을 선택한 그는 실제로 조선은 기틀을 닦는 많은 업적을 이뤄냈다. 먼저 신숙주는 법제, 의례, 역사, 국방 등 다방면에 있어서 뛰어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그는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초를 다짐은 물론, 유교윤리의 보급을 위해 다섯 가지 의례의 예법인 『오례의(五禮儀)』를 완성했다. 또한 각 왕들의 실록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동국통감(東國通鑑)』등의 역사서 등을 편찬했다. 또 일본, 중국과의 외교를 책임졌고, 일본에 사은사로 다녀온 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편찬하여 해양국의 외교길잡이의 자료로 이용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어·일본어·여진어·몽골어에 두루 통하여 어학교재를 만들어 통역관들을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신숙주는 사육신과 같은 길을 걷지 않고 세조를 선택함으로써 많은 업적을 일구어냈다. 한 학자가 실제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허울뿐인 명분을 버리고 현실을 선택한 결과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진 초석을 세우게 된 것이다.

위의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숙주를 단순히 '변절자'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척 많은 업적을 남긴 공신이다. 또한 만약 그가 그의 절친한 친구인 성삼문과 같이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면 단종 이후의 수많은 그의 업적은 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의 선택을 유교적인 관점에서의 ‘변절’로만 볼 것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발전을 원한 한명의 명재상의 ‘현실적인 선택’으로 봐야할 것이다. 신숙주에게 중요한 것은 ‘충신은 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는 쓸데없는 허울이 아니라 조선을 부강하고 올바르게 만들어나가야 할 길이었던 것이다.

학자와 정치인들이 가야할 길

당시 사회에 퍼져있는 사상과 같이 ‘한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숙주에게 있어서는 미련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신숙주와 같이 나라를 위해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는 자를 따라 여러 치적을 남기고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돕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학자와 정치인들이 가야할 길이 아닐지에 대해 필자는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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