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다시피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우왕 3년(1377)에 화통도감이 설치되었다. 화통도감의 설치와 고려의 화포 제작은 우왕 6년 8월에 있었던 진포 해전에서 왜구를 격퇴한 고려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진포 해전은 전투에서 화포를 이용해 거둔 고려의 첫 승리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화약 무기 사용이 이후 전쟁의 승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이 전투는 해전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고려시대 화약무기, 총통
고려의 화약 무기로 짐작되는 총통의 사용은 공민왕 5년(1356)에도 보인다. 이때 서북면 방어 무기를 검열하는 중에 총통이 발사되었다. 총통에서 발사된 무기는 箭(화살)이었으며, 그 사거리는 남강에서 순천사 남쪽까지였다. 그 거리가 정확히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발사된 화살이 땅에 떨어져 그것의 깃이 땅 속에 박혔다고 했으므로 화살의 속도는 빨랐을 것이고, 그것의 용량과 파괴력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과녁이 없이 날아간 화살로 볼 때, 이 총통의 발사는 사정거리를 측정해 총통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했음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이때의 화살(箭)은 일반 활에서 사용된 화살(矢)의 종류가 아니라 총통에서 발사되는 관통용 무기였음을 배제할 수 없다.

주목할 점은 고려가 자체 기술로 화약 무기와 화약을 제조했을 때가 최무선의 화통도감 설치(1377) 이후였다는 점에서 공민왕 5년에 시연된 총통은 고려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원나라의 중원 지배력이 약화된 때이기는 하나 명나라가 아직 건국되기 전이었으므로 이때 사용된 총통은 원의 지원으로 보인다.
     
 
 
고려에서 화기 사용의 의미
총통의 사용 시기도 소홀히 지나칠 수 없다. 곧 원의 지배하에 있던 중원의 한족이 들고 일어날 때와 겹친다. 가공할 무기인 화기의 사용을 원이 묵인했다면 이 무기는 원의 용인 아래 고려에 배치된 것이며, 화약의 제공도 뒤따랐을 것이다. 1271년 5월에는 김방경 등이 이끈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를 치면서 화포를 썼다는 사실도 대단히 흥미롭다. 이때의 화포는 화약 무기일 가능성이 높으며 원에 의해 동원된 것이다.

여하튼 공민왕 5년의 총통 시연을 통해서 짐작된 화포와 총통의 원에 의한 지원은 변방의 방어선 구축과 한족의 반란을 견제하기 위한 원의 의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원의 의지는 빗나갔지만 고려에서 화기의 사용이 갖는 의미는 14세기 동북아시아 세계 정세에서 벗어나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화약의 제조 기술을 터득하지 못했던 고려로서는 명나라에게도 화약의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화약이 떨어져 더 이상의 보급이 없다면 총통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이로써 넓은 삼남 지역 평야와 접한 서남해에 침범한 왜구를 고려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치고 바다로 빠지는 왜구의 속도전에 보병의 공격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의 자체적인 화포 제작과 화약의 제조는 왜구의 침입에 대한 대처의 일환이라는 집약적인 수준의 평가에만 머무를 수 없으며, 이를 원·명 교체기라는 급변했던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에서 현실을 극복하고자했던 적극적인 고려의 대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의 눈으로 본 21세기 대한민국
21세기 현재, 세계 질서는 동북아시아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듯하다. 필자는 한반도의 비핵화를 적극 지지한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대당 110억이 넘는 사드를 배치해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도 선 듯 이해할 수 없다. 북한의 미사일이 대당 10억에 미치지 못한 점은 나중에 고려할지라도 우리의 방어체계를 외제 사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단 하나의 문제 해결 방법이라고 볼 수 없다. 14세기 급변했던 고려의 눈으로 21세기의 한국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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