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의 생동하는 봄을 거닐다 학생으로 보이는 지나가는 누군가를 멈추어 세우고 “당신은 누구입니까?” 묻는다면 상대방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부분 무심히 지나치거나 혹여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질문하는 상대방을 미친 사람이나 사이비 종교인 쯤으로 치부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호의를 베풀어 진지하게 대답한다면 “나는 전남대 학생입니다” 라거나 더 세심히 배려해 “○○과 ○○입니다”라고 답변할 것이다. 그런데 한 눈에 보아도 외국인으로 보이는 학생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설사 상대방이 전남대의 구성원일지라도 제일 먼저 나오는 대답 앞뒤로 “○○에서 온 누구”라는 답변을 덧붙일 것이다. 물론 자신이 어디 출신인지 강조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 질문을 하는 전남대의 한국인과 구별되는 자신이 어디 출신의 어떤 ‘인종’인지를 궁금해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자신이 소중히 생각하고 자랑스러워하는 하나에 기대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을 어디 출신의 어떤 인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현재 자신이 위치해 있는 곳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을 드러내고 그 사회와의 관계를 표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전남대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글로벌’을 외치고, ‘세계화’를 사유하는데 ‘인종’은 다른 확장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자연스럽게 한국인으로 인식되고 자기 자신을 인종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학생들과 중국인·미국인·베트남인 등의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여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학생이 있다. 비록 문화적 다양성, 평등, 보편주의라는 이름에 가려 다른 인종들에게 가해시는 직접적인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동일한 전남대 구성원임에도 한국인과 외국인으로 통칭되는 두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외국인이라 불리는 그 안에서 더욱 세분화돼 백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시아인, 아랍인 등으로 우리에게 인식된다는 것은 이들을 대하는 타자의 방식에 다른 전략의 문제를 제기한다.

통합주의에 반대해 인종 분리주의를 주장했던 말콤x가 반복 했던 은유를 들어 보자. “자네는 이 나라에서 결코 미국인으로 취급받은 적이 없으면서 어떻게 자신을 미국인으로 간주할 수 있나? 열 사람이 탁자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내가 들어와 그들의 탁자에 앉는다고 가정하세. 그들은 먹는데 내 앞에는 빈 접시가 있네. 우리가 모두 같은 탁자에 앉는다는 사실이 우리가 모두 식사를 하는 데 충분한 것인가? 사람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같은 탁자에 앉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네”

아직 우리 사회에서 피부에 직접 와 닿지 않는 인종 문제임에도 왜 나는 외국인에 의해 전남대 후문 PC방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해 소위 말하는 ‘유색 인종’을 먼저 떠올렸는지 자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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