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학술/출판
고려의 ‘서희’, 외교 협상에서 당당함을 보여주다.■ 1563호 리더자 실록
서금석(조선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시간강사)  |  news@cnumedia.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6.03.20  22:27:17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고려 성종 12(993), 거란은 고려에 쳐들어왔다. 역사는 이 사건을 거란의 1차 침입으로 가르치고 있다. 거란의 장수 소손녕은 스스로 ‘80만의 군사라고 일컫고 고려를 위협해 항복을 재촉했다. 잠시 10세기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를 드려다 보자.
 
거란은 야율아보기[거란 태조, 재위 907~926]가 중국 북방의 내몽고 지역에서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세운 왕조 국가였다. 건국 당시에 종족의 이름을 따서 거란국이라고 했으며, 건국 후 그 세력은 급팽창해 급기야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지역을 차지해 버렸다. 그리고 거란의 2대 황제 태종[재위 926~947]은 중국의 땅 연운 16주를 얻었다.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거란의 성종대(982~1031)에 이르러 거란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이 당시 송과 거란은 남북으로 나뉘어 그 세력을 팽팽히 견주고 있었지만 사실 내몽고 지역과 만주 일대를 통합했던 거란은 송보다 일찍 동북아시아 실력자로 등장해 송을 압도했다. 고려는 五代(510)와 교류하다가 10세기 중반 이후 중원을 통일한 송과의 교류에 힘을 쏟았지만 정작 거란과의 관계는 소원하였다.
 
거란의 1차 고려 침입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 사항을 반영하고 있다. 애초 거란의 침입에 대해 고려는 아무런 정보를 갖지 못했다. 서북계의 여진이 거란의 군사 동향을 미리 알렸으나 고려 조정은 여진의 속임수로 여기고 제대로 방비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난 뒤, 또 다시 여진이 거란의 침입을 알려오자 비로소 고려는 사태의 위급함을 알았지만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속수무책이었다.
 
거란의 침입과 그들의 항복 요구에 대해 고려 조정의 대처는 어떠했을까? 고려의 관리들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이 전쟁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나는 항복하는 편을 택하자는 것이었으며, 또 다른 대안은 서경(평양) 이북을 거란에게 주자는 할지론이었다. 국론이 할지론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에 서희는 할지론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거란의 움직임을 철저히 분석했다. 그리고 그는 협상을 위해 소손녕의 거란군 군막으로 찾아갔다. 고려 국왕이 강가까지 나와 손을 잡고 서희를 위로했다고 했으니 고려의 절박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서희는 거란의 속내를 분명히 짚었다. 거란군이 청천강 이남으로 진격하지 않고 있는 점이나 실제 고려의 성을 함락한다거나 전투에 공을 들이는 대신 80만이라는 엄청난 군사의 수를 강조한 점, 전투가 아닌 주둔지에서 계속 문서로 고려 측에 의사를 전달하고 있는 점, 그리고 항복하라고 독촉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 등은 서희로 하여금 외교 협상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직감으로 이어졌다. 거란은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후방의 안정을 위해 송과 관계가 깊은 고려를 먼저 공격했던 것이다. 따라서 거란의 의도는 고려의 함락이 아니었다.
 
이 즈음해서 거란의 고려 침입을 계기로 서희의 협상력이 어떻게 발휘되었는지를 들여다보자. 협상을 위해 찾아 온 서희를 보고 소손녕은, “나는 大國의 귀인이니 그대가 마땅히 뜰에서 큰 절을 해야 한다.”고 하자, 서희는 신하가 마루 아래에서 군왕에게 큰 절을 올리는 것은 예에 맞지만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만나는데 어찌 그러 하겠소.”하였다. 그러자 소손녕이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희는 오히려 노해서 아예 숙소로 돌아가 드러누워 버렸다. 이에 소손녕이 사람을 보내 서희를 불러 마루 위에서 맞아들였다. 서희는 당당히 자신의 자리에서 협상에 임할 수 있었다.
 
협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마주 않은 두 사람 중, 소손녕이 먼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당신의 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나라 소속인데, 당신들이 침식했다. 또 우리나라와 연접해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기 때문에 이번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자 서희는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예이니, 이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평양을 국도로 정했다. 게다가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땅을 훔쳐 길을 막고 있으니 거란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준다면 어찌 국교를 맺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그 강개한 말에 소손녕은 서희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그래서 싸우지도 않고 얻은 땅이 강동 6주이며, 고려는 드디어 압록강을 접해 국경을 이루게 되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서희가 외교 협상에서 보여준 당당함은 더욱 빛난다. 최근 정부가 일본과 서두른 위안부 협상은 그래서 안타깝다. 당당했으면 한다.

   
 

 

[관련기사]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독립언론프론티어 유인물 배포, '대학답게' 선본 연관 논란 불거져
2
2018 총학생회 선거 정책공청회 열렸다
3
오는 21일 총학선거…최도형 VS 황법량 후보 출마
4
2018년도 10개 단과대에서 학생회 선거 진행
5
“우리는 어딜 가든 함께 해요”
6
"1년간 총학생회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겠다”
7
어둠 속에 남겨진 학생, 감시 없는 캠퍼스
8
“학우들의, 학우들에 의한, 학우들을 위한 학생회장 될 것”
9
모바일 투표는 처음이라!
10
나는 겁쟁이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500-757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제1학생회관 2층 신문방송사 편집실
대표전화 : 광주캠퍼스 062) 530-0527/0523  여수캠퍼스 061) 659-6655 | 팩스 : 062)530-0522 | 발행인 : 총장 지병문 | 주간  : 주정민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정기
Copyright © 2013 전남대학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