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윤동주 열풍이 불고 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 복각본이 두 달 동안 5만부 이상이 팔려 나가면서 베스트셀러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요새 웬만한 시인의 시집조차 500부도 팔리지 않는 상황에서, 이 정도 기록이면 경이적이다. 영화 <동주> 또한 개봉 10일 만에 50만 관객을 돌파했다. 저예산영화 분야에서는 단연 돋보이는 흥행실적이다. 이번 달부터는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도 3년 만에 재공연을 예정 중이다.

이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세대는 20-30대 젊은층이다. 영화를 관람하고 인증샷을 남기거나 감상평을 쓰고, 시를 필사해 SNS에 올리면서 ‘윤동주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혹자들은 젊은층의 이런 반응에 대해 각종 취업난과 경제난에 찌든 ‘헬조선의 N포세대’들에게 위로를 선사하기 때문이라고도 평한다. 시대적 상황은 다를지라도 이상과 현실이 괴리된 상황에서 고통스런 20대를 견뎌야 하는 처지가 유사해, 이들은 윤동주를 통해 아픔을 공유하고 위로받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시를 읽고 시인의 생애에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이 예기치 못한 현상은 뭔가 모르게 불편하다. 작년 국내 과자업계를 발칵 뒤집었던 허니버터칩처럼, 겨우내 전 국민이 입에 달고 살았던 ‘전해라’ 송처럼, 시인 윤동주의 이름 또한 그냥 유행처럼 소비되고 지나갈 것 같기 때문이다. 과자 인증샷도 ‘전해라’ 짤방도 모두 2030세대가 주도했었음을 생각하면 불편함은 더 커진다. 그렇게 소비되기에는 청년 동주의 삶이 무거워도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모두가 잘 알다시피, 일제강점기는 청춘에게 언어도 사유도 꿈도 허락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윤동주 시인의 20대는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꿈꾸며 조선을 병참기지로 전락시키면서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국내에서는 잡지폐간, 창씨개명, 조선어학회 강제 해산이 연이어 일어나는 시기에 온전히 걸쳐 있었다. 이런 시대에 언어를 다루는 시인이 식민지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혈기왕성한 청춘을 견뎌야 한다는 것은, 현재 우리들로서는 짐작도 못할 일이다. 그렇기에 70년 전에 타계한 시인의 이름을 소환해 위로를 기대한다는 사실조차 미안해질 수밖에 없다.

시절이 어떠하든 누구에게나 20대의 청춘은 불안한 흔들림의 연속이다. 특히나 청년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분명 윤동주의 시간이나 현재 우리들의 시간은 동질적일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윤동주를 소환하는 이유는, 인증샷이나 짤방 따위가 아닌 보다 더 본질적인 데 있어야 할 것이다. 거침없이 돌진했던 사촌 송몽규의 등을 바라보며 시를 쓰는 것조차 부끄러워했던 청년 동주가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의 삶과 가치를 온전히 지키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의 온전함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실체 없는 불안을 궁극적으로 넘어서는 무기가 된다. 여전히 매서운 바람이 부는 3월, 모두가 새다짐으로 시작하는 이 시간에 청년 동주를 청하는 이유이자,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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