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줄곧 우리 대학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궁금했다. 관련 자료를 찾던 중, 우리 대학의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인물 중 한분이 前 전라남도 지사 이을식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19년 14세의 어린 소년 이을식은 김창준 목사의 지도로 친구들과 교회 지하실에서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해 두었다가, 3월 1일 오전 11시 경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다가 다리뼈가 두 조각나는 큰 부상을 입고 살아남아 해방 이후 전라남도 지사직에 오르게 되었다. 

국립 전남대가 설립될 때, 전쟁 중이라 정부의 예산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당시 문교부에서는, 정부는 전쟁 중이니까 전라남도에서 자체적으로 종합대학을 세울만한 기본재산을 확보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이을식 지사는 먼저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全南道是製絲株式會社)의 주식을 기부받았다.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이 회사는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모든 주식이 도민들에게 1주씩 나누어 주었는데, 도민을 설득하여 전남대 설립기금으로 기증받게 된 것이다. 또한 이지사는 지역 유림 대표들을 설득하여 향교재단의 농지증권 약 9억 원을 기증받는 데에도 성공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순탄한 일이 아니었다. 전남 도의회 의원들은 도민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 놓은 도립대학의 전 재산,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 주식, 향교 재산을 합쳐 자금을 마련하였는데, 과연 정부는 국가재산을 얼마나 내놓을 것인지 분명히 밝히라고 따졌다. 당시 국가가 전시 상황에 놓여 있었던지라 문교부에 예산이 없는 것은 분명했던 까닭에, 지사의 답변은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도의회에서 이 문제가 사흘 동안이나 계속 논의되자, 과반수 찬성을 얻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이지사는 의회에 간곡한 당부의 연설을 했다. “(전략) 일부 의원 여러분들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이번 문제에 대해서는 의원 여러분들께서 단순하게 도유(道有) 재산을 국유재산으로 이관한다고 생각하시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보다는 300만 우리 도민들이 돈을 내어 하나의 민립(民立)대학을 세운다고 생각하시고, 이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이 안건을 가결해 주신다면, 이 결정이야말로 앞으로 전남도민의 2세 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청빈의 외길, 죽헌 이을식 선생전기」(전기발간위원회, 고려서적, 1999, 132쪽). 이 지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연설이 아닌 간청의 애원을 하자 도의회에서는 만장일치로 가결해 주었다. 국립 전남대는 이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남대의 실질적인 설립자는 이을식 선생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독립을 위한 애국청년이었으며, 청빈했던 이을식 지사가 우리 대학을 설립하는데 결정적인 노력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남대의 또 다른 설립자는 광주, 전남의 모든 도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소유 재산의 절반을 기증한 지역 유림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울러 도유(道有) 재산인 광주의대, 농대, 목포 상대의 합류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전남대가 앞으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정도를 걸어야 하며, 지역민과 지역사회를 위해 끝없이 헌신해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소년 이을식의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전남대를 설립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정신이 5ㆍ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는 바, 우리 전남대는 이을식 지사의 뜻을 이어받아 늘 세계의 지성으로 우뚝 서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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