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 나라가 되살아나 자신의 신념의 진정한 의미를 이어갈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노예의 자손들과 노예 주인의 자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한 자리에 앉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말은 마틴 루터 킹이 1963년 워싱턴 행진에서 했던 연설의 일부분이다.

“아니오, 나는 미국인이 아닙니다. 나는 미국주의의 희생자, 2천 2백만 흑인 중 한 사람입니다. 위선의 탈을 쓴 민주주의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 말은 1964년 우리에게 다소 낯선 인물인 말콤 엑스가 클리블랜드의 한 감리교회에서 행한 연설의 일부분이다. 1955년 12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버스 보이콧 운동으로 시작된 미국의 시민권운동의 연장선에서 한 명은 무슬림 민족주의자로, 다른 한 명은 기독교 통합주의자로 미국 흑인 해방 운동을 상징했으며 말콤 엑스는 1965년에, 마틴 루터 킹은 1968년에 백인 우월주의자들에 의해 살해 당한다.  

마틴 루터 킹, 정확히 말해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57년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를 결성해 인종분리차별 정책에 저항한다. 간디의 영향을 받아 비폭력 저항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확신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좌시위, 항의행진과 같은 전술을 활용해 인권운동에 헌신한다. 워싱턴에서 그가 행한 연설은 여론에 강한 영향을 미쳐 마침내 1964년 공공장소에서의 인종차별대우 철폐와 고용과 공공소유 시설물에서의 불법적 인종차별을 금하는 민권법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그리고 그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고 미국의 흑백 통합과 평화의 상징이 된다. 반면 말콤 엑스는 기존 시민권운동이 주장했던 백인과의 통합을 거부하고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흑인들이 단결하고 자신들의 토지, 생활, 문화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자는 ‘흑인민족주의’를 제시한다. 또한 인종차별 철폐와 투표권을 얻자는 시민권운동은 흑인들을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비판하며 흑인 민족주의에 기반한 분리주의 및 방어를 위한 폭력을 옹호하면서 혁명을 주장한다. 그의 이런 사상은 1966년 흑인들의 세력화를 상징하는 ‘블랙팬더당’으로 이어져 1970년대까지 흑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한 인물은 1986년 미국 의회가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그를 기리기 위한 국경일로 지정할 만큼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의 통합과 평화의 상징으로 남아 있고, 한 인물은 분리와 폭력의 상징으로 여전히 논란의 소재로 남아 있다. 분명 마틴 루터 킹의 통합을 위한 운동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미국 사회의 불씨로 남아있는 흑백 갈등은 이들이 주장했던 통합과 분리의 움직임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또한 국가의 통합, 지역의 통합, 당의 통합, 단체의 통합만을 외치는 한국의 현실에서도 유효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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