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얼굴을 보는데 아들이었당께. 억장이 무너졌어라.”

5·18 민중항쟁(5·18)의 첫 희생자 김경철 씨의 어머니 임금단 씨(84)가 말했다. 계엄군이 광주를 점령했던 80년 5월, 임 씨의 삶에 큰 비극이 다가오고 있었다.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김 씨는 1980년 5월 18일 금남로에서 계엄군에게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당하고 운명을 달리했다. 이틀 동안 연락이 없던 아들은 결국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온 몸에 시퍼런 멍만 남긴 채 말이다. 임 씨는 “아들은 지인과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계엄군의 습격을 받았다”며 “그 곳을 지나던 평범한 광주 시민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손녀 혜정이가 태어난 지 백일하고도 열흘 째 되던 날이었다. 아버지 없이 남겨진 어린 핏덩이를 보는데 가슴이 아팠다. 며느리는 ‘혜정이를 두고 간다’는 말만 남기고 연락이 끊어졌다. 임 씨는 “손녀는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며 “당시 어린 핏덩이로 남았던 손녀가 내 배로 낳은 자식보다 마음이 쓰인다”고 전했다.

임 씨는 “아들에게 못해준 것만 생각난다”며 말을 이었다. 어린 아들에게 ‘마이신’이라는 약을 줬는데 청신경 마비 판정을 받은 것이다. 마이신 과다투여에 따른 부작용이었다. 그는 “아들 앞에서 난 죄인이다”며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보낼 수 없었다”고 밝혔다. 진실을 위해 데모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망월동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끌려가기도 했다. 그는 “5·18의 문제를 알리고 해결하는 것이 남겨진 나의 일이다”고 말했다.

임 씨의 움직임은 지난해에도 계속됐다. 대구의 한 학생이 5·18희생자들을 '홍어 택배'라 폄하해 재판으로까지 이어졌을 때 그는 바로 대구로 갔다. 임 씨는 “변호사라는 사람이 ‘5·18은 북의 소행이다’라 말하는데 어이가 없어 두 손이 벌벌 떨리더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역사를 바르게 인지하지 못하는 어린 학생들이 안타깝기도 했다”며 “역사 왜곡을 해결하려면 80년 그날처럼 젊은이들이 나서야한다”고 밝혔다.

지울 수 없는 깊은 한을 가진 임 씨. 그는 최근 새로운 시작을 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을 치유하는 ‘광주트라우마’ 센터와 인연이 닿아 ‘심리치료’를 하고, ‘오월 어머니 합창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남편과 아들을 일찍 여의고 억척같이 살았다”며 “국가권력으로부터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깊은 상처가 이제야 치유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5·18에 대한 역사 왜곡이 존재하는 지금, 우리는 이들의 아픔을 치유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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